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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음악의 '위기'

   이 페이지에서 이 글을 읽고 계신 분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고전음악의 위기'인가 관심이 조금은 있으시리라 믿는다. 여기에는 다른 사회 현상들이 거의 그렇듯, 몇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글은 '질문과 대답' 형태로 구성했다.

Written by Youngrok LEE

1. 얼마나 현상이 심각한가?
2.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왜 이렇게 됐는가?
3. 당신은 현대음악의 주류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위 '무조 음악'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4. 위에서 첫째부터 세째까지는 이해가 가지만, 네째에는 이론(異論)도 적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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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개성 상실의 요인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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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의견을 연주계와 구체적으로 연관지어 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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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위에서 레코드의 역할을 잠시 언급했다. 레코드도 마찬가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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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세계화'가 개성적인 음악에 지장을 준다는 말인가?
10. 당신은 '원전 연주'가 이 경향을 역전시킬 수 있으리라 보는가?
11. 크로스오버(Crossover)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12.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무엇을 추천하고 싶은가?

Q1. 얼마나 현상이 심각한가?

   미국 연주회장에 들어가서 2층에서 1층을 내려다보면, 온통 하얗게 보인다고 한다. 정도는 덜하지만 유럽도 큰 차가 없다고 하는데, 젊은 사람들이 고전음악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단지 관객 감소뿐 아니라, 다음 세대에 좋은 음악인이 나타날 확률 자체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고전음악의 종말'에 대한 책까지 출판되었다니, 이미 갈 데까지 다 간 것일까... 내가 좀 진지하게 고전음악을 듣는 지인(知人)들과 - 이름을 들으면 당장 알 만한 리뷰어들까지 포함해서 - 얘기해도 마찬가지다. '고전음악은 이대로 가다가는 미래가 없다'는 데는 모두 의견이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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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2.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왜 이렇게 됐는가?

   내가 생각하는 몇 가지 요인만 밝혀 놓고 싶다.
   
첫째, 고전음악에 익숙해지는 데 - 감상이건 연주건 -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렵다. 물론 여기에는 선입견도 많이 들어 있겠지만, 일반 대중음악보다 어렵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생활이 전보다 템포가 훨씬 빨라지고, 클릭 한 번만 하면 확확 화면이 떠야 하는 인터넷 시대에 이런 '짧게는 한 시간에서 길게는 몇 달 단위'의 취미가 얼마나 호소력이 있을까 솔직이 의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처음에 들을 때 '동기 유발'이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음악은 비슷하다고 해도(실제로는 음악 연주 자체도 달라졌지만), 듣는 사람들이 바뀌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 나라에서나 이럴지 모르지만) 고전음악에 대한 선입견이 큰 장벽이다. '고전음악은 고상하다'거나, '그 어려운 것에 도전하기 싫다'는 선입견은 안 그래도 그리 쉽지 않은 고전음악에 큰 장벽으로 작용하며, 더군다나 소위 좀 안다는 사람들의 '고전음악 귀족주의'는 정말 지양해야 할 것이다. 음악 해설자 겸 연주가로도 탁월한 번스타인 같은 사람은 정말 보기 드문 사례다.
   
세째, 내가 가장 큰 이유로 생각하는 사항인데, 20세기 후반부터는 일반인이 주목할 만한 신작(新作)이 많지 않다. 나는 여기서 현대 작곡가들에 대한 섣부른 비평은 삼가겠지만, 무조음악과 그 쪽으로 치우친 음악들은 고전음악의 '발전'에는 공헌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아 고전음악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 비록 이들이 역사의 필연이기는 했지만. 대중에게 맞는 새로운 레파토리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서 시장 자체가 좁아졌기 때문이다. 소위 고전파부터 낭만파까지의 스탠다드 레파토리에 사람들이 식상하기 시작했는데도 새로운 레파토리는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니 큰 문제이다. 이제 F.J.하이든이 받은 평처럼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작품은 기대하기 어렵다. 어쩌면 현재도 공급되고 있는데 '아무도 관심을 안 가지는지도' 모를 일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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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로의 결혼'의 프라하 초연 때처럼 시민들이 휘파람으로 '피가로'의 아리아 가락을 불면서 다니는 정도까지는 나도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 베토벤처럼 약 2만의 시민이 장례 행렬에 참가하거나, 브람스가 죽었을 때처럼 출신지 함부르크에 입항한 모든 배들이 조기(弔旗)를 게양한 정도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고전음악 작곡가가 있는가? 근래 레코드 업계에서 적극적으로 '묻혀진 작품들', 고전-낭만파의 덜 알려진 작곡가의 작품이나 잘 알려진 작곡가의 덜 알려진 작품, 또는 고음악 등을 적극적으로 녹음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신작이 안 나오니 사람들이 들어 줄 만한 구작(舊作)이라도 발굴해야 하지 않는가?
   
네째, 위의 이유 때문에 어차피 같은 레파토리로 장사를 한다면 같은 곡을 연주하는 연주가들의 개성이 중요하다. 같은 곡의 연주회에 계속 가거나 음반을 여럿 구입해도 돈이 아깝지 않으려면 그 연주나 음반들이 모두 개성적이고 스타일이 달라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이 개성이 전에 비해 쇠퇴 일로에 있다. 이는 현대 악기 연주에서 특히 두드러진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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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3. 당신은 현대음악의 주류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위 '무조 음악'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현대음악에 대해 쓴 수필에서 설명했지만, 현대 음악의 주류인 '무조-12음 기법'에 대해 나는 특별한 반감이 전혀 없다. 어차피 음악사의 필연이었으니까. 이들이 현대 작곡의 주류를 잡고 그렇지 않은 음악들을 '거의 내몰았다'는 점이 문제일 뿐이다. 나는 (음반이 많지는 않지만) '무조-12음 기법'을 사용한 신 빈 악파 3인방의 작품을 들으며, 약간 경향은 다르지만 무조에 가까운 작품도 많이 남긴 바르토크의 작품을 좋아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무조에 가까운 음악을 21세기의 신작으로서 계속 듣고 싶지는 않다. 그런 음악을 계속 작곡해야 할 역사적인 필연성이 이제는 별로 없다. '진보'라는 입장으로 보아도, 현재 이런 음악은 이미 구체제지 반체제가 아니다(절대로 진테제는 아니다).
   
일반인들이 왜 쇤베르크의 피아노 변주곡이나 슈토크하우젠의 작품들보다, 하차투리안의 '스파르타쿠스'나 프로코피에프, 스트라빈스키의 후기 작품들, 쇼스타코비치, 브리튼 등의 작품을 좋아하는지 이제는 작곡가들 쪽에서 귀 기울여줄 때가 됐다는 말이다(아니 이미 지났다). 내가 알기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주가들도 이런 의견을 냈는데, 현대음악 수필에서 제임즈 골웨이의 말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예언은 다소 섣부른 짓이지만, 앞으로 또 100년이 지나도(지금 상황이라면 그때까지 고전음악이 살아남을지 걱정이지만) 무조-12음 기법을 이해하고 좋아하는 사람의 수는 조성 쪽에 비해 0.1%도 채 안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얼핏 들은 얘기지만, 아도르노는 "12음 기법 음악을 들으면서 단번에 기본음렬과 48개 파생음렬을 인식할 정도가 돼야 진짜 음악 애호가다"고 말했다는데, 정말 이래야 한다면 고전음악은 간판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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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4. 위에서 첫째부터 세째까지는 이해가 가지만, 네째에는 이론(異論)도 적지 않을 텐데?

   내가 아무리 말해 봐야 권위가 없으니, 실제로 일선에서 뛰는 연주자들과 레코드 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하겠다.

   피아니스트 안드라슈 쉬프, 인터뷰 중에서(음악동아에서 수록)

   지금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프리츠 부시, 오토 클렘페러 같은 거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음악이 무엇인지 알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쿠벨릭 같은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요.

   백혜선의 인터뷰(EMI 데뷔 음반 내지에 수록) ;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의 연주에서 시금석으로 생각하는 피아니스트를 말한다면 누구를 꼽을 수 있겠는가?'는 질문에 대해.

   모차르트는 피셔나 슈나벨의 연주를, '무언가'라면 기제킹, '트로이메라이'라면 호로비츠를 들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현재의 연주보단 과거의 연주들이 훨씬 좋다고 본다. 그 때엔 인본주의가 주는 음악성의 힘 같은 것이 존재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에 비해 지금은 너무나 전문화되고 분화되었다. 모든 것은, 특히 예술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인데 분화된 음악이란 다양성이 죽은 음악이란 말과 같다.

   오토 클렘페러, 1973년의 인터뷰에서 ; (음악적인) 범용함이 우리 시대의 황제이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말 ;

   나는 1920~40년대에 녹음된 78회전 피아노 음반을 들으면 연주가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맞출 수 있지만, 요즘의 피아노 음반들은 한결같이 똑같이 들린다.

   낙소스(Naxos) 사장 클라우스 하이만(Klaus Heymann)의 인터뷰 중에서(하이만은 낙소스 창립 전에는 콘서트 기획자로 일했었다)

   메이저 음반사들이 자신들의 오래된 녹음들을 - 때때로 아주 좋은 것까지도 - 버짓이나 미드 프라이스로 판매함으로써 스스로 망하는 길을 택했다는 점도 있겠지요. 이건 마치 집안에 가보로 전해져 내려오는 은을 버짓 프라이스로 팔아치우고 있는 판국에, 크롬 도금한 강철을 풀 프라이스로 사 달라고 바라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라고 비유하고 싶습니다.
   
만약에 제가 메이저 음반사 사장이라면 백 카탈로그[에 실린 오래된 명반들]를 초호화판으로 제작해서 풀 프라이스, 또는 그 이상의 가격을 받고, 새로운 레코딩 - 어쨌건 분량이 많긴 많죠 - 모두를 미드 프라이스로 팔겠습니다. 새로운 레코딩 중 많은 수가 사실은 고작 그 정도 가치밖에 없거든요.

   테스터먼트(Testament) 사장 스튜어트 브라운(그는 50~60년대 전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제 1 클라리네티스트였던 버나드 윌튼에게 사사한, 20여년 경력의 클라리넷 연주자기도 하다)의 인터뷰에서

   나는 목관 연주인들을 아주 많이 알고 있습니다. 지난 시절의 연주 스타일과는 많이 달라지긴 했어요. 분명히 내게는 그런 독특한 연주인들에 대해 열정이 있습니다. 내 입장에서 그런 일은 노다지를 만지는 것과 같아요. 지금은 눈을 씻고 봐도 그런 재원이 없습니다....
   
글쎄요, 요즘 오케스트라의 연주들을 보건데, 시간이 곧 돈이라서 그런지 너무 깔끔하고 정확하게 효율적인 악보에만 충실한 연주인들이거든요. 그러나 그 당시의 연주는 훨씬 소박한 패러미터를 지니고 있었죠. 요즘의 영국 오케스트라들이 보여주는 식의 그런 현실적인 성격은 없었어요. 적어도 그 당시(1950년대)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서는 말이죠.
   
런던은 물론이고 세계 어느 곳에서도 오케스트라다운 오케스트라가 없는 것 같아요. (중략) 지금 런던에는 없어요. 음악적 개성을 잃어버린 연주인들만 가득하지요. 모든 게 중성이 되버린 거예요. 음악이 중성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데이비드 넬슨(레코드 평론가)의 글에서[원문 부분 번역]

   (전략) 그러나 호로비츠가 말하고자 한 바는2) 아마도 피아노 연주에 개성이 부족한 점일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피아니스트가 자신의 개성을 펼치도록 허용하는 폭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개성 부족의 문제는 비단 피아노 연주나 음악 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어디에서나 드러나는 문제이다. (중략) 음악은 빅 비즈니스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음악회며, 오케스트라며, 음반이니 하는 것들이 지천으로 깔렸는데도 불구하고,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드물어졌다. 고도로 숙련된 유능한 피아니스트들만 수두룩하다. 피아노 리사이틀이란 지난 시절의 유물이 되어버릴 거라고 믿는 사람도 많다.
   
글쎄, 그럴 수도 있다. 만일 그리 된다면, 그것은 지난날에는 그토록 보편적이던 개인화된 음악 작업의 쇠락에 원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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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5. 그러면, 개성 상실의 요인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정확한 해답은 없지만, 나는 위 데이비드 넬슨의 글에 나온 "피아니스트가(, 예술가의) 개성을 펴도록 허용하는 폭이 줄어들었다"는 의견에 대체로 동의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연주를 하는, 그리고 보는 잣대가 점점 하나로 쏠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이미 벨라 바르토크와 졸탄 코다이가 헝가리 농민 음악을 채집하면서 경험한 일이 있다. 1930년대와 1950년대에 같은 지역에서 농민 음악을 축음기로 녹음했는데, 이 짧은 동안에도 눈에 띄게 농민 음악의 질이 떨어졌다고 한다. 훌륭한 바르토크 전기를 쓴 홀시 스티븐즈(Halsey Stevens)는 이 원인을 "통신이 훨씬 편리해지고 특히 도시의 대중 예술 음악과 접하게 되어, 예전 형태의 농민 음악은 농촌의 수공예 기술처럼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는데, 나는 비슷한 이유를 지금의 '개성 상실'의 원인으로 거의 그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Q6. 너무 돌려 말하는 듯하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수 없는가?

   지금의 국제적인 아티스트 시장, 세계적인 연주 여행, 국제화된 레코드 산업이 고전음악의 저변을 확장시켰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현상은 대부분 좋은 점과 나쁜 점의 양면을 갖게 마련이다. 위에 열거한 '국제화'의 좋은 점은 '고전음악의 저변 확대'겠지만, 나쁜 점을 지금부터 열거하도록 하겠다.
   
문제의 핵심은, 이 국제화가 '지역색''수공업적인' 예술 작업을 거의 없애 버렸다는 점이다. 개인적인 예술을 싹틔우기에는, 현재의 예술 지망생들은 너무 많은 영향에 노출되어 있다. 지금 누가 어느 국제적인 레코드 회사에서 녹음을 했다고 하자. 그러면, 발매되자마자 전 세계에서 그의 연주를 구해 볼 수 있다. 연주회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연주 여행'은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다. 제트기로 길어야 하루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연주자도 불러 올 수 있다. 20세기 초만 해도, 대서양 횡단조차도 배로 며칠 걸릴 만큼 불편했다. 국제화가 다양한 스타일이 공존할 여지를 줄였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으며, 결국에는 대중에게 가장 잘 어필(appeal)하는 서너 가지 스타일만 살아남는 결과를 초래했다.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까지 개입한 셈인데, 이런 획일화는 개성과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법이다. 과일의 경우에서 보듯이, 다양성은 맛도 좋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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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7. 당신의 의견을 연주계와 구체적으로 연관지어 줄 수 있겠는가?

   성악계에서 원거리 연주 여행이 쉬워지면서, 기존의 '앙상블 오페라' 시스팀이 '스타 오페라'로 바뀌었다고 한다. 나는 '앙상블 오페라' 시스팀을 찬성하거나 스타 오페라 시스팀을 비난할 의도는 전혀 없다. 모두 장점과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몇 스타들이 전 세계의 오페라 극장에 출연하면서, 특정 스타일의 스페셜리스트들이 설 자리를 줄여 버렸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스타 도밍고가 바그너 녹음에서도 주역으로 출연하는데,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거의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도밍고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전문 가수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생긴 일일 뿐이다). 1950년대 초반에 바이로이트 무대에 마리오 델 모나코가 서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가? 요즘 분위기는 좀 뛰어난 가수에게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제네럴리스트(generalist)가 되기를 요구하는데, 동전의 양면처럼 장점과 단점이 있겠지만 개성에서는 결코 득일 수가 없다.
   
오케스트라도 마찬가지 변화를 겪고 있다. 리카르도 무티는 오케스트라에 대해(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였다고 기억한다) "내가 브람스를 지휘할 때는 브람스 사운드, 라벨을 지휘할 때는 라벨 사운드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는데, 과연 이게 그리 바람직할까? 오먼디가 필라델피아의 상임 지휘자를 물러난 후, 무티와 자발리시 등을 상임으로 거치면서 유명한 '필라델피아 사운드'- 오먼디는 자기 자신의 소리라고 말했다 -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전에는 푸르트뱅글러와 카라얀(베를린 필), 토스카니니(NBC 심퍼니), 멩겔베르크(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클렘페러(필하모니아), 므라빈스키(레닌그라드 필), 스토코프스키(필라델피아)와 오먼디(필라델피아), (클리블랜드), 번스타인(뉴욕 필), 쿠셰비츠키와 뮌시(보스턴 심퍼니), 앙세르메(스위스 로망드), 라이너와 솔티(시카고 심퍼니)등 유명 오케스트라와 장기 재임의 상임 지휘자는 뗄 수 없는 존재였다. 한 오케스트라를 십 년 이상, 길게는 50년까지 장악하며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한 지휘자들이(이 지휘자들의 영향을 좋건 나쁘건 어느 편으로 판단하든지 상관없이) 사라지면서, 이른바 악보와 지휘봉만 갖고 다니는 '객원 전문 제트기 지휘자'들이나 몇 년 머물지 못하는 단기 지휘자들이 개성적인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만들어낼 수 없음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

Q8. 당신은 위에서 레코드의 역할을 잠시 언급했다. 레코드도 마찬가지인가?

   레코드의 장점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도 양면성이 있다.
   
음악 지망생들에게는 레코드가 현재 더없이 귀중한 존재이지만, 도대체 누가 레코드의 압도적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심지어는 알프레드 브렌델마저 "나는 쇼팽에 대한 코르토의 개념에 완전히 감금되어 있다. 그것이 쇼팽을 연주하는 유일무이한 방법이기 때문이다"고 말할 정도다. 음악적으로 아주 어린 지망생들이, 레코드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개성적인 예술을 터득하기가 그렇게 쉬울까?
   
레코드가 음악 지망생들에게 그 영향력으로 위험한 존재라면, 프로 연주가들에게는 압박을 가하는 경쟁 상대이다. 78 회전 어쿠스틱 녹음에서 CD, DVD로 재생 매체가 발전한 100년 동안 쌓여 온 녹음의 수는 엄청나며, 음반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녹음만 해도 (소수인 10년대를 제외하고) 192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다양하다. 이 녹음들 자체가 현대 연주가들에게는 상당한 압박감으로 작용한다. 자신들의 연주에 항상 비교 대상이 되며, 가능한 해석의 숫자를 소진해 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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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는 말할 것도 없고 - 브람스는 평생 동안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단 두 번밖에 듣지 못했다고 한다 -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레코드를 그리 중요시하지 않는 음악가가 많았으며 쌓인 녹음의 수도 훨씬 적었다. 최소한 레코드는 연주가들에게 경쟁 대상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지금은 어떤가? 고전파에서 낭만파까지 걸치는 스탠다드 레파토리에서는, 좀 유명한 곡이면 대충 20종 이상의 음반을 쉽게 구해 볼 수 있다. 그것도 모두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주가의 것으로. 백혜선의 "전 시대의 거장들이 남긴 녹음이 무서우면, 연주회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벌써 우회적으로 이 압박감을 전달해 주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레코드 산업의 입장에서는 '소량 다품종 생산'을 요구하는 고전음악보다는 '다량 소품종 생산'으로 효과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일반 대중음악이 훨씬 더 매력적인 대상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같이 전세계적으로 배포될 때, 제한된 돈으로 음반을 구매하는 대중이 어느 편을 더 좋아할까? 이미 같이 얘기할 대상도 별로 없는 고전음악? 아니면 거의 누구나 다 듣는 - 안 듣는다면 거의 왕따 분위기인 - 대중음악? 소니 뮤직 사장의 말은 차라리 솔직해 보인다. "나는 팝으로 돈 벌어서 클래식을 먹여 살리고 있다." 지금처럼 제로 섬 게임(zero sum game)으로 나가면 고전음악이 살아남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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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9. 그렇다면, '세계화'가 개성적인 음악에 지장을 준다는 말인가?

   현재 상황은 불행히도 그렇다.
   
개인적인 음악 만들기(music-making)야말로 개성의 근원이다. 그런데, 현재는 스타일 간의 차이점이 크게 줄어들었다. 음악에는 만병통치의 묘약 같은 것은 전혀 없으므로, 어느 스타일이나 나름대로 설득력과 장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시대의 청중 변화에 따라 특정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흐름이, 쉽게 말해서 '유행'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유행이 전 지구적으로 되어 다른 스타일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경우에 생긴다. 원래는 그럴 뜻이 없었다 하더라도.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뱅글러는 늘 연주 스타일의 기준처럼 회자되었으니, 이 두 사람을 예로 들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토스카니니가 등장하던 시기는 푸르트뱅글러식 연주 스타일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토스카니니와 바인가르트너 등이 악보에 중점을 두는 연주를 주류로 정착시켰다고 하는데, 이제는 현대 악기 연주는 거의 이 스타일이다. 그러면, 지금 푸르트뱅글러식 연주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아주 힘들다. '어떻게 그렇게 연주할 수 있었는지', 즉 노하우(know-how)가 지금 맥이 거의 끊겼기 때문이다. 공존이 바람직하고 또 그래야만 하지만(Es muss sein, ja ja ja!!), 음악처럼 객관적인 기준을 세우기 어려운 분야에서도 공존이 그리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세계로 퍼진 고전음악 산업 자체가 고전음악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는 이 역설적인 사실, 아마 초창기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선견지명은 학식이나 지식과 항상 양립하지는 않는다.

Q10. 당신은 '원전 연주'가 이 경향을 역전시킬 수 있으리라 보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이 말이 원전 연주의 가치 폄하가 아님을 주목하기 바란다.
   
역사적으로 보아, 원전 연주는 주관적 스타일에 대한 객관적 스타일의 논리를 악보뿐이 아니라 악기와 주법, 연주 양식에까지 확장시키려는 태도에서 출발했다. 대전제는 '역사적인 타당성'이다. 선구자로는 아놀드 돌메치 등의 학자들을 비롯하여, 연주계에서 공헌한 사람으로는 앙리 카자드쥐(명 피아니스트 로베르 카자드쥐의 삼촌이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반다 란도프스카 등을 들 수 있다. 현재는 데이빗 먼로, 호그우드, 레온하르트를 중심으로 한 네덜란드계 연주가들, 아르농쿠르(논란이 있지만 공로자임에는 틀림없다), 가디너, 괴벨 등의 노력에 의해 확고하게 정착되었으며, 특히 고전파와 그 이전 작품의 연주에서 이들이 쌓은 공적은 탁월하다3) . 최근 고전음악 연주계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는 이들이 거의 독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전 연주는 지금 거의 전성 시대라고 해도 좋으며, 원전 연주가 없었다면 고전음악계는 이미 20년 전에 심각한 쇠퇴에 직면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원전 연주가 열어 놓은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음악 시장은 대단했다.
   
하지만, 내가 2번 질문의 답에서 열거한 근본 문제들을 볼 때, 원전 연주가 이것까지 해결할 수 있을까? 아니다. '기존 작품의 연주 방식을 하나 더 발굴한 것'으로 고전음악이 직면한 현재의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발굴은 '새로 공급'하는 방법보다 항상 한계가 있다. 지금까지 묻혀 있었다는 말은, 대부분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라면 이미 어떻게든 세상에 드러났을 확률이 높다). 하나 더, 발굴 자원 자체도 언젠가는 동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위에서 말했듯이, 원전 연주가 고전 음악의 대파국(catastrophe)을 최소 20년 늦춘 공은 인정해야 하지만, 그래도 내가 열거한 문제 중 어느 것 하나도 근본 해결을 할 수 없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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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1. 크로스오버(crossover)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크로스오버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귀동냥'만으로 말할 수 밖에 없다. 즉 내 말의 신뢰도가 다른 답들에 비해 떨어짐을 감안하고 들어 주시기 바란다.
   
크로스오버가 주목받았던 이유는 '고전음악의 대중성 획득'이란 측면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연주에 주목한 사람들을 정통 연주 쪽으로 유인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내가 시큰둥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크로스오버가 근본 문제인 '신작 공급 부족'을 해결할 수도 없으며, 내 경험으로는 크로스오버는 고전음악보다는 혼합된 장르(예를 들면, 재즈 기법을 차용한 경우에는 재즈)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재즈 기법을 스트라빈스키가 '병사의 이야기'에서, 라벨이 바이올린 소나타나 피아노 협주곡 등에서 차용했다고 해도 이 곡들은 어디까지나 고전음악의 어법(語法; idiom)에 따르고 있다. 상당수의 크로스오버는 정통 고전음악의 어법에서 거리가 멀다. 바네사 메이가 연주한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를 좋아하다가 오르간 연주 음반을 산 사람 중에(얼마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과연 어느 정도나 오르간 연주에서 더 흥미를 느끼고 정식으로 고전음악으로 입문할까? 나는 부정적이다. 이럴 바에야 고전음악의 어법 자체를 이해시키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다.
   
하나만 덧붙이자. 크로스오버를 나보다 더 많이 들었던 고전음악 애호가들은 한결같이 '이건 아니었다'라고 애기했다는 점이다.

Q12.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무엇을 추천하고 싶은가?

   근본 문제점으로 나는 '고전음악의 어려움, 선입견, 신작의 빈약함, 개성 상실'을 들었다. 고전음악의 기반이라 할 애호가층을 넓히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교육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두 다 아시겠지만, 우리 나라 초중고 교과과정의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음악 시간은 솔직이 아무 쓸데도 없다. 그놈의 입시 지옥, 정말 못해먹을 짓이었다. 물론, 고전음악에게도 못할 짓임에 틀림없다. 학교 교육이 이것을 제공하기 어렵다면, 음악계 일선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오케스트라가 보급 프로그램에 - 저렴한 입장료로 봉사하는 -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하는 등의 방식으로. 번스타인 같은 탁월한 해설자가 고전음악에 공헌하는 바는 일반적인 생각보다 훨씬 크다. 그리고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 여러분 주변의 누가 '고전음악 들을 만 해? 뭐 들어야 돼?'라 묻는다면 제발 친절히 안내해 주시라. 아무리 힘든 일이라고 하더라도. 직접 안내해 주시기가 귀찮으면, 인터넷에서 좋은 사이트라도 소개시켜 주시라. 누가 무슨 일을 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신작 보급 면에서는 내가 뭐라 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정도로 끝내고 싶다. 개성 상실에 대해서는, 다들 악보에 대해 좀 더 자유롭고 대담한 시각을 가져 줬으면 한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다. 이 둘 중 일반 애호가가 거들 수 있는 일은, 별 재미 없는 작품이나 연주자를 듣지 않는 외에는 거의 혹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어쩌면, 이게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더 좋은 방안 있으면 알려 주시라. 나는 인류가 10000세기가 돼서도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바그너, 바르토크, 드뷔시, 그리고 앞으로 나타날 거장 작곡가들의 명작을 들으며 감동하는 광경을 보고 싶다. 내가 무엇으로든지 환생해서나, 아니면 유령으로서든 간에. 왜냐하면, 이들을 잃어버리는 것은 단순히 예술 장르 하나가 망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고 인류의 가장 고귀한 정신의 산물 중 하나를 잃어버리는 결과기 때문이다.

각주

  1. 원전 연주 분야에서는 상황이 아직 나은 편이다. 아직 역사가 그다지 길지 않다는 이유도 있으며, 악보 자체에도 원인이 있는데 이는 아래 주 3번을 보시기 바란다.
  2. 바로 위에 나온 호로비츠의 말.
  3. 이는, 옛 작품들로 갈수록 연주가에게 연주의 세부 사항을 맡기는 경향이 크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서스튼 다트가 이미 1950년대 초에 말했다. "현대 음악에서 연주자의 위치는 한갖 피아놀라(pianola)나 전축이나 마찬가지다" 정격 연주가 고전파 이후로 올수록 다양성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것이며, 당연한 말이지만 20세기 작품들은 악기 측면으로 보나 악보 측면으로 보나 정격 연주의 개념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다.
  4. 사실 요즘은 무조 음악도 '이미 낡았다'고들 한다. 최일선에서 뛰는 작곡가들은 이 기법도 소화해서 작곡 방법의 일부로만 구사하지 그 이상은 아니라고들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고전음악 풍토가 척박한 우리 나라에서 현대음악 (무조음악 말고) 레파토리가 적극적으로 무대에 올라가지 않은 점도 이해는 가지만 역시 아쉽다. 고전음악에서 떠나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잡을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c) 2001~, 이영록 ; 링크는 자유지만, 인용하시려면 우선 제게 메일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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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 ; 4th Apr.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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