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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현대음악

   현대음악이라는 말이 나오면 먼저 학을 떼는 애호가가 꽤 많으실 것입니다. 뭐 그런 음악이 다 있냐는 말부터 도저히 못 듣겠다는 등.... 하지만 현대음악은 그렇게 비판만 받아야 할 음악도 아니고, 진짜 맘 잡고 들으려고 노력하면 꽤 재미있게 들을 수도 있는 곡도 제법 됩니다. 물론, 조성음악보다는 친숙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 시간에 다른 조성음악을 듣겠다"고 하신다면야 하는 수 없지만요.

Previously contributed in Hitel(1995)
Partially corrected on Dec. 2001

1. 어떤 현대음악이 어떤 불평을 듣는가
2. 현대음악이 받는 비판은 정당한가
3. 현대음악은 '시대를 앞서가고 있을' 뿐인가
4. 현대음악을 끝까지 현대음악으로만 들을 것인가

어떤 현대음악이 어떤 불평을 듣는가

   이 글을 읽는 분에게 솔직하게 얘기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 내가 '현대 음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며, 둘째 내가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다들 받는 피아노 교습을 빼고는 전혀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을 미리 밝혀 놓지 않는다면 오해가 생길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이) 학교 음악 교육을 조성음악을 통해 배웠다. 한국 사람이 이런 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는 데 지금 나는 그리 찬성하고 싶지는 않지만1), 먼저 우리들의 음악 감각의 기반이 서양 조성음악의 틀 안에 있음을 인정하면서 이 글을 시작하고 싶다.
   
이 점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대중 가요'들도 모두 조성에 의지한다는 사실을 되새겨 보시기 바란다. '대중 음악'을 내가 일부러 찾아 들으려 한 일은 없으나, 나 정도의 토종 한국인이 대중음악에 전혀 무지하랴? ^^ 노래방이나, 수없이 대중 교통 수단을 타고 다니는 동안 나온 음악들이 전부 그 때 '거의 가장 잘 나가는 음악'이었으니까. 31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그 때 가장 인기있는 음악'을 듣는 동안에, 나는 이 중에서 서양 조성음악이 기반이 아니었던 것은 단 하나도 들은 적이 없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으로는, 이것을 모두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인데, 대중의 정서에 '가장 쉽게 호소할 수 있다'(아니 있다고 일반적으로들 생각하는) 대중음악이 모두 서양 조성음악에 의지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반 대중의 음악 고정관념이 조성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는 충분하다. 길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노래 불러 봐라"고 할 경우, 조성음악이 나올 확률은 100%. 물론, 음치가 걸리는 경우 유사 무조음악(!)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현대음악이 받는 비판 중 중요한 것을 들어 보자. 이것은 현대음악이 갖는 성격을 명확히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1. 듣기가 짜증나고 알아들을 수 없다.
2. 두뇌적이고, 정서가 결여되어 있다.
3.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음악 인지 능력의 한계를 무시했다.
4. 음악의 중요한 표현 수단 중 하나인 조성을 빼앗아 버렸다.
5. 예술은 단순히 '혁신'이나 '진보'라는 이름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이런 성격의 글은 어느 음악 동호회 게시판이라도, 꽤 올라왔을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현대음악, 이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맞다. 사실 필자가 쇤베르크 이후, 소위 '무조와 12음기법'을 이용한 음악 중에서는 좋아하는 것이 거의 없다. 대다수의 대중들이 알아듣기 힘들다고 말한다면야, 그 대중들보다 나을 것이 별로(아마 하나도) 없는 내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여기서 하나 유의할 것은, 일반인들이 '듣기 힘들고 못 알아듣겠다'고 말하는 것은, 거의 '무조와 12음 기법'을 이용한 음악의 경우라는 점이다.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해 보자. 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 1875~1962)는 시대로만 본다면 현대 작곡가임이 틀림없다. 리햐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1940년대에 작곡한 일련의 관악기 협주곡들은 어떤가? 또는 호아킨 로드리고(Joaquin Rodrigo, 1902~1998)'아랑후에즈 협주곡'은 어떻게 들릴 것인가? 아니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의 다양한 작품들은? 이 예에서, 현대에 작곡되었다 하더라도 조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작품들은 그다지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알아들을 수 없는 현대음악'의 논의는 '무조와 12음기법 음악을 알아듣기 어렵다'는 논의로 귀착된다.
   그러면, 무조와 12음기법을 이용한 음악들이 왜 우리에게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는가? 이유는 우스울이만큼 간단하다. 낯설기 때문이다. 앞의 문장을 다시 반복하자. 우리들의 음악 감각이 조성음악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조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음악'은 낯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무조음악이 나올 때부터 물론 있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현대음악이 받는 비판은 정당한가

   소위 '현대음악'이 왜 조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며, 실제로도 조성이 없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흥미있는 주제이다. 이 주제에 대한 논문의 양도 엄청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상세히 논할 자격도 실력도 없기 때문에, 내가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정도만 말하고자 한다.
   
무조와 12음 기법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1874~1951)는 무조(atonality)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방법은 '모든 조성을 포함'한다면서, '() 조성(pantonality)'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해 주지 않았다. 들리는 음악은 마치 조가 없는 것 같았으니까. 모든 조성에 관계된다는 것은, 즉 어느 조에도 중요성을 두지 않는 의미이고, 이것은 바로 조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이해되었다. 그러나, 내가 읽어 본 바로는 아무래도 쇤베르크 자신의 정의 쪽이 훨씬 타당할 것이다.
   
쇤베르크는 기존의 선율선(melodic line)을 개성적인 방법으로 몹시 흐뜨러뜨렸기 때문에, 그의 선율을 제대로 잡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의 악보를 보면, 반음계로 상승 하강하는 선율들을 자리바꿈하여 단 9도나 장 7도로 만들었으며, 이 스타일은 그의 제자 안톤 베베른(Anton Webern)도 마찬가지다. 이런 습관은 그냥 들으면 쉬울 진행도 '어렵고 낯설게' 만든다. B-A-G#-G-F#의 단순한 반음계적 하행 진행을 쇤베르크는 단 9도로 자리바꿈하여 octave 이상 간격을 벌려 놓는다. 이것 뿐이 아니다. 단순한 F#-G의 앞꾸밈음 구조도 같은 방식으로 사이를 벌린다. 한 선율선이 진행하면서도 여러 악기에 분배되며, 복잡하게 다른 옥타브를 넘나들면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이런 외견상의 어려움 외에, 전통적인 '선율선과 반주'의 구조에서 반주의 부분을 강박에서 이탈시키는 방식으로, 잘 들리는 저음의 중심음 - 즉 근음(根音) - 을 흐려서 어떤 한 조에 중심이 놓이는 것을 피한다.그러나 그의 악보를 재구성해 보면, 그의 음악이 조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바그너나 멀리는 슈베르트와 쇼팽 등이 이미 사용했던 반음계적인 화성 진행을 조금 더 빈번하고 빠르며 복잡하게 제시하는 데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단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12개의 음(, 조성) 모두에 균등한 중요성을 두고 있으며, 이것이 소위 쇤베르크의 '급진성'의 본질이다.

   위에서 사람들에게 무조의 인상을 주는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근음(根音)의 불명확함
2) 빈번하고 반음계적인 화성의 바꿈
3) 선율의 빈번한 도약
4) 어느 한 음이나 화음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음

   대략의 설명이나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쇤베르크의 방법이 서양음악의 전통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려면 이것으로도 충분하리라 믿는다.

   무조음악이 두뇌적이고 정서가 결여됐을까? 글쎄, 나는 무조 음악을 많이 듣는 편은 아니기 때문에 확실한 답을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다소 지나치지 않을까. 사실 무조음악에서 정서가 결여됐다고 느낀 일도 있다. 나는 슈토크하우젠(Stockhausen)'Gesang der Jüngling(젊은이의 노래)'를 들은 일이 있다. 이 곡에서 깊은 정서가 느껴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글쎄다. 내 생각으로는 이 곡은 애초에 청중이 정서로 받아들여 주기를 기대하지 않았다는 느낌이었으니까.
   
아마 무조음악 중 일반에서 가장 이해가 쉬운 분야라면 가곡이나 오페라 등 대본이 있는 음악들일 것이다. 무조음악이 낯설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조성음악은 강조점이나 통일성, 감정의 변화 등을 위해 조바꿈을 사용하지만, 무조음악은 이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에 조성음악과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는 대본에 의해 어느 정도 완화된다. 대본이 음악을 '설명'해 주기 때문인데, 현대 오페라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베르크의 '보체크(Wozzeck)'에서는 음악이 대본에 따라 실로 다양하게 변화하며, 극의 분위기를 매우 다채롭게 표현한다. 또 쇤베르크의 무조 시대의 걸작인 '미친 피에로(Pierrot lunaire)'의 음산한 분위기는 이 퇴폐적인 시가 요구하는 것 이상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무조음악이 특별히 두뇌적일 이유는 없다. 앞에서 자세히 말한 것처럼, 음악이 무조로 들리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이 중 어느 것을 보아도 '두뇌적'하고는 그리 큰 상관이 없다. 12음 기법이 두뇌적이라고 주장한다면, 12음기법의 규약이나 조성음악의 7음 음계(소위 전음계)의 규약 중 어느 쪽이 더 복잡하냐고 질문했을 때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다음을 비교하자.

12음 기법 ; 옥타브 안의 12음을 다 써서 음렬(serie)을 구성. 이 기본음열에서 역행, 반전 등의 다양한 음렬을 유도
조성음악의 음렬 ; 한 음을 기준으로 한다. 이 기준음에서
   장조 - 온음, 온음, 반음, 온음, 온음, 온음, 반음
   단조 - 온음, 반음, 온음, 온음, 반음, 온음, 온음(자연 단음계)
이 규약으로 음계를 구성

   조성음악도 위의 '복잡한' 제약이 있음을 이해하시겠는가? 두뇌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낯설음 때문이다. 조성음악이 더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은 단지 오랜 동안 들어서 익숙해 있기 때문이며, 제약이 없는 것처럼 들리는 것도 단지 그 때문이다.

   3의 문제는 좀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기고 있다. 어떤 하나의 음이 울릴 때는 그 음의 배음들도 함께 울린다. 1이라는 진동수를 가진 음이 울리면, 진동수 1 외에 2,3,4,...의 정수배의 진동이 섞여서 나온다. 악기에 따라 어느 특정한 배음이 잘 울리고, 이것이 바로 악기 특유의 음색을 만드는 것이다. C음을 울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위에서 아래의 숫자는 기본음의 진동수에 대한 배수이다. 2배의 진동수면 한 옥타브 위의 C, 3배면 G(평균율로는 정확히 G는 아니지만 작은 차이는 무시하도록 하자), 4배면 2배의 2배니까 2옥타브 위의 C, 5배면 E... 이런 식으로 16배의 진동수인 음까지 보였다. 실제로 악기로 한 음을 울리면, 들리는 것은 대부분 2-6배 정도까지의 진동수며, 그 이상은 거의 귀로는 식별할 수 없다. 바로 위의 음렬이 소위 화성 배음열(harmonic overtone series)이며, 우리가 어울림화음이니 안어울림화음이니 하는 것은 바로 이 음열에 연관된다. 어울림화음인 C장조의 Ⅰ화음을 보자. C-E-G인데, 이 음들이 배음열의 기본음에서 제 6 배진동음까지인 것을 아시겠는가? 7 배진동음인 B♭음까지 같이 울리면 소위 '딸림 7화음'인데, 이것은 '안어울림 화음에 가까운 울림'을 갖는다. 그 다음 제 9 배진동음인 D음을 추가한다면, '딸림 9화음'인데, 안어울림화음이지만 9화음 중에선 가장 어울림화음과 울림이 가깝다. 그 다음인 제 11배음(F#)부터는 완전히 안어울림화음이 된다. 장황하게 배음열과 화음의 관계를 설명했는데, "사람의 귀는 한 음이 울릴 경우 무의식적으로 그 음의 배음들이 들리기를 기대한다". , 사람이 들리기를 기대하는 가장 안정된 화음은 기음에서 장 3-3도로 겹쳐 쌓인 화음(3화음)이 되는 셈이다. 이것은 실제 어느 음(기음)을 울렸을 때 가장 두드러지게 들리는 배음들이다. 한 가지 예로, 단조의 끝마침이 장조보다 불안정하다고 얘기하는데, '피카르디 3'의 마침(단조의 곡을 단조의 으뜸화음인 단 3화음으로 마치지 않고 장조의 으뜸화음인 장 3화음으로 마치는 것)이 단조에 흔한 것도 장 3화음이 단 3화음보다 안정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 기음이 울리는 경우 사람의 귀는 그 기음에 대해 다른 11음 중 특정한 2, 즉 장 3도 위의 음과 완전 5도 위의 음을 무의식적으로(외관상으로 거의 들리지 않더라도) 기대하므로, 반음계의 12음 모두가 동등하게 파악되지는 않는 셈이다. 따라서 12음 모두를 동등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은 사람의 음 인지능력과 어긋난다는 것이다.2) 나는 이 의견에 반박할 만한 능력이 없다. 이 논의도 매우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이니만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자세히 소개하는 데 그치고 싶다.

   4의 내용도 논의될 점이 많다. 비판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한다면, 조성 중심이 없고 협화음과 불협화음 사이의 명확한 구별도 없으며(쇤베르크는 이것을 '불협화음의 해방'이라고 말했다), 불협화음 사이에도 뚜렷한 구분이 없는 것은 표현 수단으로서 기능하는 화성적 기법을 음악에서 박탈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조성감을 없애기 위해 쇤베르크 등이 사용하는 방법 - 위에 현대음악이 어째서 조가 없는 것처럼 들리나 한 논의에서 엄격하게 언급했다 - 이 조성음악이 갖는 제한 만큼이나 인위적인 느낌을 음악에 준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넓은 도약과 이로 인해 흩어져 파편적으로만 들리는 선율, 고의적으로 복잡하게 된 리듬 구조, 계속되는 불협화음의 단조로움 등이 바로 그것이다. 월터 피스턴(Walter Piston)조차도 그의 '화성법'에서 현대음악의 기법에 대해 "고의적이건 아니건 이로 인해 음악의 리듬적 활기는 찌들게 되었다"고 평할 정도이니, 이것이 어떠한(!) 단조로움을 음악에 주었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이것이 조성음악에 의한 편견이라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쇤베르크가 그의 12음 기법으로 쓴 작품 중에서 고전적인 폐쇄적인 형식들을 사용한 것 - 예를 들어서, 관현악을 위한 op.31은 엄격한 변주곡 형식이다 - , '그 작품을 모든 음표가 정확하지 않게 연주되는 브람스의 작품처럼 들리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3)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감상자의 사고의 혁신을 요구한다. 예 그대로, 만약 연주회장에서 브람스의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 음표가 아주 심하게 틀려 가면서 '엉터리로(!)' 연주된다면, 여러분은 그냥 그것을 들어 가면서 잘 연주한다고 칭찬하실 것인가? 그런데 그런 상황이 연주회장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작곡자가 직접 지시해서 말이다. 지금까지의 감상 방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작곡자가 앞서 가는 것인지 청중이 뒤진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조성 음악이 기본 패러다임인 한으로는 무조음악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며, 무조음악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음악의 가능성을 보여 줬다는 것이다.

   "단순히 '진보'라는 개념으로 무조음악을 찬성하는 것은, 과학과 같은 엄격한 객관적 체계가 음악 등의 예술에도 적용된다고 단순히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오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음악적으로는 논의할 수가 없는 내용이니 그냥 덮어놓는 것이 속 편할 것 같다. 내가 과학을 전공하기는 했지만, 진화론의 논리 패턴이 예술까지 적용될까 하는데는 솔직이 말해서 매우 회의적이다. 이런 문제가 명확한 해답이 없다는 것이 예술에 얼마나 독창성과 융통성을 더해 주는가를 생각하면 정말 다행이다.

현대음악은 '시대를 앞서가고 있을' 뿐인가

   이 글을 잘 읽어보신 분이라면 금방 느끼셨을 것이다. 나는 현대음악에 대해서 맹목적인 찬성도 맹목적인 반대도 하지 않았다. 사실 현대의 딜레탕트 뮤지션이나 음악 애호가들은 어느 편에도 꼭 설 필요는 없지 않을까? 무조음악에 대해서는 가장 뛰어난 작곡가나 연주가들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니까, 이것으로 위안을 삼아서 내가 현대음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데 대해 변명(!)을 하고 싶다.
   
다소 길더라도, 인용해 보면...

리햐르트 슈트라우스 ; 쇤베르크 일파를 맹렬히 비난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 ; 음악의 조성은 물질 세계의 중력과 마찬가지로 불가결한 것이며, 조성을 무시해 버리려는 시도는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혼돈에 빠지는 결과가 된다.
브루노 발터(
Bruno Walter);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과 '구레의 노래'는 좋아했지만, 12음 기법엔 의혹을 가졌다고 전해짐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 쇤베르크의 방법을 이해는 못 하겠지만, 그가 젊으니까 아마 그가 맞을 것이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Wilhelm Furtwängler) ; 예술에서 영원한 진보가 존재한다는 명제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제일 먼저 깨달은 작곡가가 브람스이다.
제임즈 골웨이(James Galway) ; 베버가 "베토벤은 정신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비난한 일도 있지만, 우리는 실험적인 전위 작곡가들을 비난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 그렇다고 해서 요즈음의 많은 현대음악들이 연주만큼이나 듣기도 어렵고, 실제로 음악 자체가 상당히 난해하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현대음악은 애호가의 수가 적으며, 나도 이 음악에 몰두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가끔 연주를 한다거나 연주 위촉을 받기도 한다. 평상시 음악에 대한 내 신조는, 내가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없는 음악은 연주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음악에 이렇게 부정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반대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그것은 진보적인 작곡가들 중에도 과거의 음악으로 돌아가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음악 중에서 내가 호응하고 연주하기를 원하는 음악은 어느 정도 과거를 반영하고 있는 현대음악이다.
요즈음의 현대음악은 1970년대의 거칠고 실험적인 색조는 많이 퇴색했고 작곡가들은 일반 사람들이 그들의 음악보다는 '전원 교향곡'이나 '세레나데'와 같은 아름다운 선율로 차 있는 음악을 좋아하지, 그들의 극도로 주관적이고 특이한 빛깔을 지닌 음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중략) 다시 말하지만, 나는 현대 작곡가들의 작품 중에서도 이렇듯 과거에 근간을 두고 있으면서도 창조적인 작품을 좋아한다.

   이는 뛰어난 음악가들 사이에서도 현대음악이 전면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음을 잘 보여준다. 모든 음악가들이 에르네스트 부르(Ernest Bour)처럼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도 초연 때는 '3/4시간 동안 연주한 악단원들의 노고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평을 들었습니다"라고 현대 작품들을 옹호하지는 않는 것이다.

현대음악을 끝까지 현대음악으로만 들을 것인가

   과거에 비해서 현대의 음악 애호가들은 여러 가지 발명품들로 인해 좋아하는 음악을 언제든지 쉽게 들을 수 있고, 싫어하면 언제나 피할 수 있으며, 그 수 또한 엄청나게 전 시대보다 증가했다. 따라서 음악 전체로 볼 때(고전음악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음악의 종류(와 시대)에 따라 각각 애호가들이 매우 많으며, 새로운 종류의 음악도 곧(전보다 얼마나 빨라졌는가를 생각해 보자!) 애호가들을 획득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현재의 음악계는 '은하계와 같이 영구히 넓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은 19세기 중반까지의 상황인 '고전적인 음악이 감상자에게 거의 존재하지 않던' 상황과는 크게 다르며, 음악 애호가들에게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렇게 많은 정보들(즉 음악의 종류) 속에서 애호가는 어떤 음악을 선택할 것인가? 이러한 증가 일로를 걷는 엔트로피의 흐름 속에서 감상자로서 어떤 태도가 가장 바람직할 것인가? 아마 저명한 작곡가 중 가장 자유롭고 다양한 양식적 전이들이 작품에 반영된 사람일, 스트라빈스키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창작자의 기능은 자기가 [상상력]에서 받는 요소들을 체로 쳐서 고르는 일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가 스스로에게 한계를 부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통제되고 한정되고 손길이 가해지면 가해질수록, 그만큼 더 자유로워진다. (중략)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나의 행위 영역을 한층 더 좁게 하고, 한층 더 많은 장애에 휘말려들면 들수록 나의 자유는 커질 것이며, 또 의미가 깊어질 것이다. 구속을 감소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정신력을 감소시킨다. 사람은 한층 더 많은 구속을 부과할수록 그만큼 더 정신을 속박하고 있는 쇠사슬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

   창작자를 감상자로 치환해 보자. 감상자가 음악을 들을 때 그 음악의 언어로 자신을 제한할 수 있다면 어떨까? 앞에서 설명했지만, 어떤 음악이든지 분석이 가능한 특정 체계를 기초로 하고 있다. 내 말은, 뛰어난 감상자는 어느 음악을 듣더라도 그 음악의 기초 체계 안에 '자신을 구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감상자에게는, 어떤 음악이든지 모두 'Open Book'이다. 쇤베르크가 한 일은 이 구속 체계의 가능성을 증가시킨(즉 자유도의 증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무조음악이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존재하는 이유이다.

   관찰자의 개입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는 없다. 감상자의 고민 없이는 현대음악은 끝까지 '현대음악'일 뿐이다.

각주

  1. 사실, '국악'이라 불리는 옛(그리고 지금의) 한국 음악에 대해 내가 거의 또는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나한테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른다. 안드라스 쉬프는 "그들의 민요를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모르는 일본 음악가들도 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이 우리 나라 음악가들이라고 예외일까.
  2. 더 복잡한 이론도 보았지만 당연히 논란이 많다. 이런 엉성한 글에서 구태여 소개할 명분이 없다.
  3. 'Wrong-note Brahms', 평생을 브람스를 존경하고 그를 '진보적인 작곡가'라고 평했으며, 그의 '작곡법'에서도 빈번히 인용했던 쇤베르크에게는 정말 모욕적인 말이었을 것이다.
  4. 추천 도서 ; D.J.Grout 'The history of Western music'(우리 나라에서 음악사 분야에서는 거의 필수로 손꼽히는 유명한 책이다. 많은 부분은 여기서 인용했다), H.Leichtentritt '음악의 형식'

(c) 1995, 2001~, 이영록 ; 링크는 자유지만, 인용하시려면 우선 제게 메일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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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ed ; 21st Dec.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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