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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ROWITZ, Vladimir(1st Oct. 1903~ 5th Nov. 1989)

[ All possible piano sounds under his finger ]

1. Curriculum Vitae

[ Left Photo ] Horowitz at young age

     지한 예술가는 보통 혼자 작업하고, 세상의 시선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 대부분은 그렇지만, 안 그런 경우도 전혀 없지는 않다. 아마 20세기에 거의 모든 피아니스트가 동경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부러워했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가 얼마간 외면적인 과시욕이 있었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반면 그가 20세기의 피아니스트 중 피아노의 음색에 대해 완전히 통달한 달인이란 점까지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지금 레코드로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사람 중에, 그는 그야말로 피아노에서 날 수 있는 모든 소리를 다 낼 수 있는 사람에 가장 가까왔기 때문이다.

    라디미르 고로비츠(Gorowitz)- 뒤에 호로비츠라고 개명했다 - 1903년 러시아 키에프에서 태어났다. 릭스 블루멘펠트(Felix Blumenfeld)등 당대의 쟁쟁한 피아니스트들이 친척이기도 해서 일찍부터 음악에 친숙했고, 10대 후반에 이미 피아노의 테크닉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조숙했다. 하지만 애초에는 작곡을 희망했다는데, 러시아 혁명에 의해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피아니스트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활발히 연주 활동을 벌여 레파토리만도 100곡이 넘었다고 한다.
    밀스타인 페이지에서도 말했듯이, 호로비츠는 밀스타인 및 피아티고르스키와 함께 1925년 유럽 연주 여행을 떠난1986년의 '모스크바 실황'때까지 러시아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1928비첨 지휘 뉴욕 필의 연주회(비첨의 미국 데뷔기도 했다)에서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1번으로 미국에 데뷔했는데, 처음에는 비첨의 템포에 잘 따라 가다가 약간 느린 듯한 연주에 청중이 자리를 뜨는 모습이 보이자 3악장에서 '포성을 울리면서' 단번에 해치우기로 결심하고 그대로 실행했다. 물론 비첨과 관현악단 뿐 아니라 청중 및 비평가들도 기절초풍했다. 비평가들은 "러시아 스텝에서 온 회오리바람이 일거에 미국을 휩쓸었다"거나 "야성이 울부짖는 소리" 라고 그의 연주를 평했다.
    1933년 토스카니니의 베토벤 연속 연주회에서 '황제'를 독주한 이후 결국 1936년 그의 딸 완다(Wanda)와 결혼했으며 딸 하나를 두었다. 그즈음 약 2년 동안 연주회를 쉬고 1939년 스위스에서 다시 연주를 시작했는데, 이 때에는 이미 누구나 젊은 세대에서 1인자라는 평가를 했다. 1940년대 초까지는 장인과 자주 협연했으나, 그 이후는 주로 다른 사람과 협연했고, 같은 RCA 소속이던 프리츠 라이너와는 음반도 2개 남겼다. 1953년경 카네기 홀에서 데뷔 25년 축하 연주를 할 때는 마땅히 거의 모든 평론가가 세계 최고의 거장 중 하나라고 인정하고 있었는데, 그 직후에 12년 동안 무대에 서지 않았다. 그 동안에도 RCAColumbia에 녹음은 자택의 방을 개조한 스튜디오 및 레코드사의 스튜디오에서 계속 하고는 있었는데, 호로비츠 부인 완다는 "... 아무도 없는 스튜디오에서만 연주한다는 데 조금 질린 모양이에요..."라고 한 적이 있다. 그 직후 그는 전설적인 196559일의 카네기 홀 실황으로 무대에 다시 돌아온다. 표를 판매하기 시작한 날 바로 다 매진돼 버렸고, 아침 일찍부터 줄 서 있는 사람들에게 호로비츠 부부는 커피를 배달해 주었으며, 그들은 호로비츠에게 전보로 '커피 감사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 실황은 그대로 레코드로 들을 수 있는데, 나 같은 얼치기 피아노 애호가들에게는 축복이다.
    그 후 19781월의 카네기 홀 데뷔 50년 실황, 1986년의 모스크바 실황 등 만년까지 여전히 활발히 활동했고 녹음도 쉬지 않았다. 만년에 DG로 레코딩 회사를 옮겼다가 마지막으로 Sony Classical에 다시 녹음을 남긴 후,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자택에서 세상을 떴다.

2. His art & recordings

    호로비츠의 레코드를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피아노가 저런 소리도 낼 수 있구나'란 탄성이 흘러나온다.

    내 피아노 실력이야 뻔하지만, 피아노를 칠 때 나는 소리(음색)에 대해서는 열심히 귀를 기울이며, 내가 연주하는 동안에도 물론 그렇게 한다. 어떤 악기든지 '연주'가 다른 사람에게 소리를 들려주는 일인 만큼, 음색에 무신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1)
    물론 기본 음색이 좋은 피아니스트는 많고, 특히 20세기 초나 그 이전에 태어난 거장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의 고유한 소리가 있다. 이런 '개성적인 소리'를 요즘 팔리는 음반으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르투르 슈나벨, 에트빈 피셔, 빌헬름 켐프, 빌헬름 박하우스, 발터 기제킹 등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소리의 기본 '' 자체는 연주하는 작품이 바뀌더라도 크게 변화가 없다. '기본 소리'가 녹음에 따라 놀랄 만큼 다양한 사람이라면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테르를 들 수 있을 텐데, 그도 같은 연주회나 한 작품 안에서는 음색이 아주 많이 달라지지는 않는다.2) 좀 과장을 섞자면, 호로비츠는 한 작품을 연주할 때도 '피아노 여러 대를 갖다 놓고, 피아노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옮겨 가면서 연주하나  싶을 정도다. 그의 몇 실황 녹음에서도 그렇고, 더군다나 그는 자기 피아노를 연주회장에 갖다 놓고 연주한 일이 많았으니 녹음 기술의 장난일 리는 더더욱 없다. 그래도 도대체 어떻게 이 정도로 소리가 달라질까 하는 의구심이, 같은 악기를 약간이나마 다루는 입장에서 안 들 수가 없다.
    이것은 호로비츠가 피아노가 소리를 어떻게 내며, 어떻게 하면 소리가 바뀌는지 극히 잘 이해했을 뿐 아니라 그 구현에서도 달인이었다는 얘기다. 피아노는 건반을 누르는 순간 손가락을 어떻게 하느냐와(이것이 '터치'), 페달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소리에 대단히 변화를 줄 수 있다. 집에 피아노가 있으면 한 번 실험을 해 보기 바란다. 주의 깊게 듣는다면, 오른쪽 페달을 미리 밟은 채로 건반을 누를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소리가 미묘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리를 크게 내거나 작게 내거나 해도 음색이 달라짐을 쉽게 알 수 있다. 호로비츠는 피아노의 음색을 바꾸는 데 이런 현상을 최대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 손가락의 터치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페달 밟는 순간과 터치 순간을 자유자재로 조합했다는 것이다. 다양한 터치를 지녔고, 거기에 페달링을 조합하여 이 정도로 다채로운 소리를 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호로비츠의 음반은 상당히 많이 볼 수 있다. 그의 음색이 음악에 어떤 효과를 주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연륜과 기교가 가장 잘 조화된 미국 Columbia(현재 Sony Classical) 시대(1962~73)의 녹음을 먼저 꼽고 싶다. 무엇보다 스카를라티의 소나타집은 절품이다. 피아노의 음색 변화가 어떨 수 있는지에 대한 교본이며, 단순히 음색의 향연으로 끝나지 않고 곡의 성격과 극히 잘 어울려 이 소품들이 대곡과 맞먹는 감동을 준다. 다음으로는 쇼팽과 슈만이야말로 호로비츠의 중심 레파토리일 텐데, CD로 대략 두 장 정도 되는 쇼팽 녹음은 그야말로 섬광처럼 빛나는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특히 폴로네즈 5~7번과 소나타 2번은 압권이다. 슈만 음반도 마찬가지인데, '어린이 정경'에서 호로비츠의 음반을 우선 고려하지 않을 피아노 애호가는 없다. 아라베스크나 크라이슬레리아나의 아름다움은 절묘하다. 토카타는 너무 쉽게 연주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인데, 이 어려운 곡을 음악적으로 다룬 솜씨는 경탄스럽다. 낭만파 시대의 거장답게 라흐마니노프나 스크리아빈 작품집, 슈베르트의 즉흥곡 몇 곡 등도 대단하다. 베토벤은 보통 아주 대중적으로 추천받지는 않으나 기술과 빛나는 음색은 정말 훌륭하다.
   
이 시대의 녹음 중 실제 무대에서 그가 보여 준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는 당연히 1965년의 '카네기 홀 복귀 연주회'를 꼽아야 한다. 12년 만에 연주회에 돌아온 그를 기념하는 연주회답게 처음의 박수부터 모든 앙코르까지 고스란히 다 수록했을 뿐 아니라, 첫 곡 바흐-부조니의 '토카타, 아다지오와 푸가'의 시작 부분에서 크게 실수하는 모습까지 그대로 담겨 있을 정도로 현장감이 생생하다. 물론 이 실수 뒤에 바로 '제대로 돌아가기는' 하지만, 12년 만에 청중을 만나는 그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1966년의 콘서트 및 1968년의 '호로비츠 on TV' 등도 좋다.
   
초창기 EMI 녹음들은 Columbia 녹음들보다 훨씬 젊게 들리는데, 기교성 및 패기가 당연히 더 돋보인다. 전에 EMI에서는 References 시리즈의 3장 세트로 30년대 녹음들을 모아 내놓았던 일이 있는데, 현재는 Naxos 발매로 상당 부분을 구해 볼 수 있다. 리스트 소나타는 장렬한 기교와 긴장감이 정말로 압권이다. 전반적으로 뒤의 원숙한 1960년대 이후와 비교하면 더 외면적임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데뷔 때 '러시아 스텝의 회오리바람'이란 평이 결코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RCA 시기는 40년대 초~60년대 초, 그리고 74년에서 DG로 이적하기 전인 82년 경까지로 나뉜다. 전기에는 우선 장인 토스카니니와 협연한 실황과 스튜디오의 차이코프스키 1번과, 스튜디오의 브람스 2번을 떠올리게 되는데, 차이코프스키는 물론 데뷔 시절을 연상시킨다. 격렬하고도 아름다우며, 토스카니니의 전혀 양보 없는 협연과 불꽃을 튀긴다. 반면 브람스 2번은 곡의 성격과 차이코프스키 정도로 잘 어울리지는 않지만 - 내 생각으로는 이 곡에 필요한 광활한 공간이 좀 모자란다 - 가끔 이 곡을 격하게 듣고 싶을 때는 선택해 볼 만 하다. '전람회의 그림'은 이 시대 녹음들 중에서 기막히다. 47년의 스튜디오와 51년의 카네기 홀 실황 두 가지가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실수는 다소 있더라도 현장감이 뛰어나고 음질도 더 좋은 카네기 홀 녹음을 좋아한다. '피아노로 연주하는 라벨 편곡'일 정도로 극히 화려하며, 외면적 효과에서 다른 어떤 녹음도 따라올 수 없다. 리히테르의 두 연주가 원전판의 극점이라면 정반대 극점인 셈이다. 이 외에 라이너 협연의 베토벤 '황제'의 강렬한 선명함이나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7번의 소름 돋는 마력을 놓칠 수 없다.
    RCA
후기의 녹음들 중에서는 아마 미국 데뷔 50주년 기념 연주회를 잡은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이 가장 유명할 것이다. 그 치고는 드문 협주곡 실황 녹음인데 - 더군다나 오먼디가 뉴욕 필을 지휘한 드문 사례다 - 연주는 당연히 매우 좋으나 호로비츠의 피아노 소리를 직접 듣고 아는 사람들에 따르면, 피아노 소리를 아주 엉망으로 바꿔 놓은, 전적으로 잘못된 음반이라고 한다. 나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 시기는 실황이 꽤 많은데, 점차 미스 터치가 늘어가는 모습을 숨길 수 없어 유감이지만 1981년 메트로폴리탄 실황을 추천하고 싶다. 그 외에는 슈만 후모레스케와 소나타 3번 등이 들어간 음반도 좋다.
   
최만년 DG의 녹음은 현재 내가 안 갖고 있는데, 부분적으로는 DG의 첫 스튜디오 녹음을 들었을 때의 실망감 때문이다. 81년 메트 실황과 몇 년 차이도 없는데 쇠퇴가 너무 확연하다. 그렇더라도 기회 되면 사 보고 싶은 음반이 있는데 슈베르트 소나타 21번과 모차르트 협주곡 23번이다. 최후의 녹음은 다시 Sony에 있는데, 궁금하긴 하지만 꼭 돈 들일 생각은 나지 않는다.

    호로비츠가 '악기에 대한 이해가 음악성과 비례하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다'라고 말하는 평론가도 있긴 하다 - 참고로 그 평론가는 브렌델 및 아라우의 지지자였다고 한다. 내 생각에, 호로비츠는 그 둘보다는 리히테르와 비교할 만 하며, 음악에 대한 태도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정반대에 가까왔다. 사실 둘을 진지하게 비교한 사람은 리히테르의 스승 네이가우스였는데, 그의 책 '피아노 연주기법'에서 인용하면

... 리히테르의 태도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이다'라 할 수 있다. 반면 호로비츠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공이다'였다(그는 나중에 상당히 태도를 변화시켰다)...

    나는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그가 미국 데뷔 연주회의 일화에서 보듯이 성공을 우선적으로 추구했을지 몰라도, 그럴 필요가 없어진 뒤, 특히 몇 번의 은퇴 생활을 지낸 후의 그의 음악은 이미 청중이 있건 없건 크게 상관이 없으며, 그의 기술과 사고는 거의 음악 쪽으로만 향해 있다. 어떤 면에서 사람들이 리히테르와 호로비츠를 보는 시각은 20기 바이올린의 쌍두마차로 불렸던 하이페츠와 오이스트라흐를 방불케 하는데, 사람들은 오이스트라흐의 원만한 인간성과 음악성을 존경했지만 하이페츠의 기막힌 기술을 갖고 싶어했다. 마찬가지로, 피아니스트들은 리히테르의 음악성을 존경했지만, 호로비츠의 음색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 본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장담할 수 있다. 평론가 네빌 카두스(Neville Cardus)"그는 앞으로 태어날 피아니스트들까지 합쳐도 가장 뛰어날 것이다"라 말했듯이, 호로비츠는 최소한 지금까지는 피아노에서 가능한 음색이 무엇인지 거의 모든 가능성을 보여 준 유일무이한 존재기 때문이다.   

Footnotes & Links

  1. 노이하우스는 '학생들과 함께 작업한 중 1/3은 음색(tone)에 관한 일이었다'고 말할 정도다.
  2. 리히테르는 피아노의 제작사나 상태까지도(물론 어느 정도 수준만 된다면) 전혀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사례는 유명한 피아니스트들 중에는 대단히 드물다.
  3. Horowitz website ; including discography.

(c) 2008~ , 이영록 ; 링크는 자유지만, 인용하시려면 우선 제게 메일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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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ed ; 13th Jan.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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