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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no Walter(15th Sep. 1876~17th Feb. 1962)

[ Theme and variations ]

Based on the contributed material at SPO magazine, Sep. 2009 1]
Corrected on Mar. 2010

◀ 브루노 발터(Private collection; Naxos CD 8.111032)

 푸르트뱅글러의 강렬한 낭만주의 및 자기 주장이나 토스카니니의 선각자적인 현대성에 가려 항상 두 번째나 세 번째로 언급되던 거장, 그가 브루노 발터다. 하지만 당대의 평가는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지금 보더라도, 그는 역시 당대의 거성들 중 손꼽는 인물이었음은 물론이다.

   발터는 푸르트뱅글러와 마찬가지로 베를린 태생이다. 태어날 때의 이름은 브루노 발터 슐레징어(Bruno Walter Schlesinger)였다. 중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다고 하는데 8세에 슈테른 음악원2]에 입학했다. 소위 천재 소년이라 다음 해에 선생 및 학생들 앞에서 연주회를 열었고, 불과 13세 때인 1889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회에서 모셸레스의 협주곡을 협연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길을 지휘로 돌려 놓은 것은 같은 해에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의 지휘를 보면서였고, 실제적으로는 쾰른 오페라의 상임 지휘자로 1890년대 초 슈테른 음악원의 작곡과 지휘 강의를 맡고 있던 아르노 클레펠(Arno Kleffel)의 도움이 컸다. 클레펠의 추천으로 발터는 1893~94 시즌에 쾰른 국립 오페라에서 코레페티터(Korrepetitor)로 경력을 시작한다. 지휘대에 오른 첫 무대는 로르칭의 '칼 대장장이'였다. 1894년 함부르크 오페라의 합창 지휘자로 옮겨 거기서 말러를 처음 만났는데, 말러는 "젊은 친구,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지요?"라 물었고, 발터는 "당신이 요구하는 것은 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말러가 크게 웃고 자기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좋아요, 좋게 들리는군요”라 답했다고 발터 자신이 회고한다. 이 이후 그는 말러의 가장 친밀한 친구이자 제자로 지낸다. 이 즈음부터 우리가 아는 ‘브루노 발터’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바그너 ‘뉘른베르크’에서 주인공 발터 폰 슈톨칭(Walther von Stolzing)을 연상시키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프레스부르크와 리가 등을 거쳐 1900년에는 베를린으로 돌아왔는데, 여기서 R.슈트라우스와 카를 무크 등과도 알게 되었으며 피츠너의 오페라 ‘불쌍한 하인리히(Der arme Heinrich)’를 초연했다. 발터는 후에 뮌헨에 있을 때 그의 ‘팔레스트리나(Palestrina)’도 1917년에 초연했으며, 그와는 평생 친구로 지냈다.
   1901년 말러의 초청으로 빈 궁정 오페라로 옮겨 1913년까지 지냈는데, 여기서부터 발터의 명성은 전 유럽으로 퍼지기 시작했으며 말러 사후 ‘대지의 노래’와 교향곡 9번을 초연했다. 하지만 말러가 가장 보람이 있었다고 회고하는 시기는 1913년부터 1922년까지 이어진 뮌헨 궁정(1918년부터 국립) 오페라 총감독 시절이다. 그의 명망은 대단했으며 떠날 때 토마스 만, 피츠너를 포함한 많은 저명 인사가 공개 서한으로 발터에게 사직을 재고해 주도록 요청했을 정도였다. 이 이후는 29년까지 샤를로텐부르크 가의 베를린 시립 오페라에 재직했는, 이 시절은 베를린 음악의 황금기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푸르트뱅글러, 1927년 이후에 나타난 크롤 오페라의 클렘페러, 국립 오페라의 에리히 클라이버 등 거장들이 즐비했다.3] 1929~33년에는 푸르트뱅글러의 후임으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상임도 맡는다. 이 기간에 20년대 초부터는 베를린 필과도 정기적으로 매해 6회씩 ‘브루노 발터 콘서트’를 열었다.4]
   1933년 나치의 등장 때문에 그는 오스트리아로 활동 무대를 옮겼고 주로 빈 필하모닉을 지휘했는데, 이 시기에 HMV에서 빈 필하모닉과 꽤 많은 녹음을 남겨 놓았다. 1938년의 말러 교향곡 9번 실황 녹음을 마지막으로, 불과 2 개월 뒤에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프랑스 국적을 얻어 주로 비독일권 국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도 그리 길지 않았는데,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발터가 193911월 미국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NBC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 외에 주로 뉴욕 필하모닉과 관계가 길었다. 1939년부터 시작하여, 1947~49년은 오케스트라 쪽의 요청으로 정기 콘서트의 절반을 지휘하며 직책은 고문이었지만 사실상의 상임으로 재직했다.5] 그 외에 시카고 심포니, LA 필하모닉, 보스턴 심포니,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메트로폴리탄 등 주요 오케스트라를 거의 지휘했으며 객원 지휘의 녹음도 꽤 있다. 이 시기에는 주로 뉴욕 필하모닉과 녹음이 많이 남아 있다. 유럽으로도 1948년부터 다시 활발하게 객연하여, 베를린과 빈의 필하모닉 외에 프랑스 국립 라디오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한 방송 녹음이 존재한다.
   1957년 심장마비를 겪은 후 그는 1선의 지휘 활동에서 은퇴하여 있었는데, 미국 Columbia 측에서는 스테레오 녹음을 시작하면서 그의 주요 레파토리를 모두 재녹음하자고 제안했다. 발터는 이를 받아들여 그가 살던 LA 비벌리 힐즈 근처에서 LA 필하모닉의 멤버가 많이 참여한 콜럼비아 심포니를 지휘했으며, 가끔 뉴욕으로 와 뉴욕 필하모니와도 녹음했다. 녹음 세션은 그의 건강을 고려해 1958년부터 매년 1~3월에만 진행했다. 그의 마지막 녹음은 1961331일까지 녹음한 모차르트 장송음악과 서곡집 등으로, 1962년에는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녹음을 하지 못하고 217일 심장마비로 영면했다.

   토스카니니가 발터를 ‘센티멘탈한 멍청이’라고 불렀다는 얘기는 유명하며, 요즘의 애호가들은 보통 만년의 정서적인 스테레오 녹음으로 그를 기억하기 때문에 그 얘기가 꽤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는 한다. 꽤 유명한 우리 나라 평론가 한 명이 ‘브루노 발터 같이 서정적인 낭만주의자는 아이다를 지휘할 수가 없다’고 딱 잘라 말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의 이전 시기에는 그렇지 않았음을 잊으면 안 된다. 발터가 단순히 서정성만 추구했더라면, 미국에서 공연한 베르디의 레퀴엠과 - 토스카니니의 극적인 화려함에 비해 훨씬 종교적인 색채가 강했다고 하지만 - 베를린에서 공연한 ‘아이다’가 어떻게 ‘완벽한 공연’이라는 격찬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 때문에, 그의 음악에 대해 말하려면 시기별로 분별하는 편이 좋다.
   레코딩으로 그를 만나는 한에서는, 크게 세 시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1930년대의 HMV 녹음, 그 후 미국 Columbia에 녹음한 1940~1956년의 모노랄 시대, 마지막으로 1957년 이후 LA 필하모닉의 멤버가 가담한 콜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주로 지휘한 스테레오 시대이다. 가장 이른 HMV 시대에도 시대를 감안하면 녹음이 의외로 많은데, 도시바-EMI에서는 ‘브루노 발터의 예술 I/IICD 14장씩으로 구성된 세트 2개를 발매한 적이 있다. I집은 빈 필하모닉, II집은 다른 오케스트라들과 녹음한 것이다. 이것은 현재는 사실상 구할 수 없고, 모차르트는 1991EMI 본사 레페랑스 시리즈로 나왔다가 지금은 (물론) 폐반이다. Naxos에서 주로 말러와 베토벤 위주로 몇 개를 발매한 외에는 이 시기 음반을 구해 보는 것 자체가 요즘은 쉽지 않다. 이 때부터 세 번을 녹음한 작품들을 비교해 보면, 대부분 일관되게 후의 녹음으로 갈수록 템포가 늦다. 78회전 시대의 명연으로 알려진 말러 교향곡 9번은 연주 시간이 71분 정도에 불과하다. 베토벤 6번 연주는 나중의 유명한 스테레오 녹음에 비해 훨씬 에너지가 넘치는 느낌이다. 60대 초반까지만 해도 발터는 훨씬 힘 있는 음악을 구사했던 것이다.6] 1930년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처럼 꼭 한 번은 듣고 싶은 예외적인 레파토리도 있는데 아직 들어 볼 기회가 없었다.
   모노랄 시대의 미국 Columbia 녹음에도 아직 만년의 스타일이 전면으로 완전히 나타나지는 않았다. 만년의 일면을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한 모차르트 레퀴엠(1956)에서 두드러지게 관찰할 수가 있다(이 해석은 ‘눈물 짜는’ 스타일이라는 별명도 있다). 하지만 브람스 4번 및 브루크너 7번을7] 뒤의 스테레오 녹음과 비교하면 전체적인 인상이 매우 크게 달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긴장감, 에너지, 상당히 빠른 템포가 뉴욕 필하모닉의 훈련된 앙상블에 실려 전달된다. 이 시기의 연주 중에서는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도 좋다. 브루크너 7번의 연주 시간을 비교하면 아래 표와 같다.

악장 1 2 3 4 총 시간
1954(New York po.; live) 17:35 16:59 8:58 12:16 56:00
1961(Columbia so.; studio) 20:48 19:24 10:21 12:51 63:24

   이 시기에 뉴욕 필을 지휘한 중요한 녹음으로는 베토벤(6번만은 필라델피아 관현악단)브람스의 교향곡 전집이 있고, 기념할 만한 세계 최초의 LP 발매로 나탄 밀스타인과 협연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언급해야 한다. 협주곡으로는 스턴이나 제르킨 등과 협연한 녹음도 팔리고 있다. 말러로는 교향곡 1,4,5번이 있다. 이 외에 아무래도 페리어와 함께 빈 필하모닉을 동원한 녹음인 말러 '대지의 노래'3개의 뤼케르트 가곡(Decca), 그리고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EMI)를 빼놓을 수 없다. 뉴욕 필이 주는 강한 느낌과는 뭔가 다른데, 이 쓸쓸한 느낌의 전달은 페리어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와 빈 필의 음색과 이제는 분리하기가 어렵다.

   그의 최만년 스테레오 녹음들에서는 ‘뭔가 끈이 풀려 있는 느낌’을 - 아마 오케스트라의 앙상블도 한몫 했을 것이다 - 받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깊은 느낌을 주면서도 대단히 온화한 표정을 지닌 해석에는 무언가 거부하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 오히려 이 서정적인 해석으로도 나름의 일가를 이루고 설득력을 갖추어 좋은 음질로 그의 음악을 친숙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나는 브람스 교향곡 4번과 모차르트 교향곡 40번에서 발터의 스테레오 녹음과 푸르트뱅글러의 녹음(EMI)을 비교해 듣기를 좋아하며, 이 두 거장의 만년의 특성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추천한다. 푸르트뱅글러 전기의 저자 헤르베르트 하프너 등 여러 사람이 인정하는 것처럼 그와 토스카니니는 일반 애호가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거리가 가까운 데 비해, 그와 (만년의) 발터는 그 이상으로 거리가 멀다. 1악장도 그렇지만, 특히 4악장에서 두 사람의 템포 설정은 진짜 거의 정반대다. 같은 악보를 이렇게 정반대로 해석해도 모두 음악이 훌륭하다는 데 놀라울 뿐이다. 이래저래 그의 이 시기 콜럼비아 심포니를 지휘한 베토벤브람스 교향곡 전집(미국 Columbia)은 아직까지 추천할 만한 값어치는 충분하며, 특히 '전원'과 브람스 4번은 훌륭하다. 다음으로는 개인적으로 하이든 '군대'를 좋아한다. 이 외에 이 시대에 녹음된 곡만 열거하자면 말러 19, 드보르작 8,9, 슈베르트 5,9, 하이든 88, 브루크너 4,7,9, 브람스와 바그너의 관현악곡집, 협주곡으로 프란체스카티를 기용한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협주곡들이 있다. 스테레오로 뉴욕 필을 지휘한 녹음으로는 말러의 '부활', '대지의 노래'슈베르트 '미완성'이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고전 반열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하다.
   내가 발터의 모차르트 녹음들을 거의 언급하지 않아서 의아해할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테레오 시기의 연주들인 후기 교향곡 6곡 및 관현악곡(link 1,2)들은 특히 금관악기 파트를 너무 심하게 죽여 놓은 문제가 있어서8], 애수와 설득력이 넘치는 40, 장엄한 프리메이슨 장송 음악, 좀 무거운 듯하지만 품위와 부드러움이 ‘염가 음악’이라는 인상을 불식하고도 남는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직'을 빼면 적극 추천하기는 좀 주저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뉴욕 필과 녹음한 모노랄 녹음들은 이 문제에선 스테레오 녹음들보다는 좀 낫지만 금관악기의 균형 문제는 여전하다. 모차르트 해석 스타일이 많이 달라진 2009년의 시각에서는, 현대 악기 연주 중에서 추천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조지 셀의 ‘군대풍’ 스타일이나 마젤의 기백 있는 연주(link; 1,2)쪽을 더 좋아한다.
   발터가 처음에 천재 소년 피아니스트로 알려졌고 후에도 가수들의 반주를 많이 맡은 만큼, 피아노 녹음도 가끔 볼 수 있다. 독주로는 1937년의 모차르트 협주곡 20번이 유명한데, 현재는 사실상 구할 수 없다. 소프라노 로테 레만의 슈만 가곡집(Sony, Naxos)과 페리어를 반주한 에딘버러의 실황 녹음(Decca)이 추천할 만 하다. 후자는 좀 좋지 않은 녹음에도 불구하고, 페리어의 육성 소감까지 보너스로 들어 있으며 한 번 들어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잘 알려진 일이지만, 당시의 독재형이 많던 지휘자들 중에서도 발터는 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의 리허설 스타일은 '발터형'이란 말이 지휘자 스타일의 한 극단적 전형으로 통할 정도였으며 토스카니니나 기타 다른 당시의 유명 지휘자들이 휘두르던 독재 방식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거장으로 남을 만큼 오케스트라 단원을 잘 통솔했다면, 같은 권력을 갖고도 사용하는 방법은 정말 여러 가지 방법이 있구나 싶다. 그의 자서전 '주제와 변주'를 본 사람들이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그가 정말 선의가 넘치는구나 하면서 감탄한다고 하니까 말이다. 물론 선의만으로 세상이 다 잘 굴러가지는 않겠지만...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나 브루노 발터 같이 인간적인 사람들을 더 자주 보았으면(음악계 뿐 아니라) 하는 기대는 생각보다 어려운 모양이다.

각주

  1. 공개에 동의해 주신 SPO Magazine에 감사드린다.
  2. 현재의 베를린 음악 콘서바토리다.
  3. 오른편의 사진은 베를린의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1929년 환영회가 열렸을 때 찍었다.
  4. 베를린 필의 수장이던 니키시가 1922년 세상을 떴을 때 후보자 중에는 발터도 있었다. 하지만 운터 덴 린덴 街의 베를린 국립 오페라와 계약되어 있던 푸르트뱅글러가 자리를 떠나면서까지(후임은 다음 해에 에리히 클라이버가 됨) 베를린 필에 지원해 왔으며, 베를린 필의 공연 기획자가 그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발터는 이 자리에 올 수 없었다. 이 콘서트 시리즈는 1933년 나치 때문에 독일에서 발터가 활동이 불가능할 때까지 이어졌다.
  5. 토스카니니가 NBC로 떠난 후 바비롤리 및 로진스키의 시대를 거쳐 번스타인이 되기 이전에는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이 자주 바뀌었다. 1947년의 경우 로진스키가 오케스트라와 불화 끝에 갑자기 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6. 사실 이것은 거의 대부분의 연주자들에게 공통적인 현상이다. 만년이 될수록 템포가 빨라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7. 1954년 실황으로, 미국 Columbia가 원래 레코드 발매 계획으로 녹음했다 발매하지 않던 것을 Testament가 최근 발매했다.
  8. 이 문제는 칼 뵘의 유명한 BPO 녹음에서도 나타난다. 당시의 일반적인 모차르트 교향곡 해석 경향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 특히 발터의 이 스테레오 녹음과 뵘의 BPO 녹음은 이 문제가 심한 편이다.

The Resources

(c) 2009~, 이영록 & SPO; 링크는 자유지만, 인용시에는 미리 메일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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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ly contributed for SPO Magazine; Sep. 2009
Created ; 15th Mar. 2010
Last update ; 21st Mar.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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