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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h Kleiber(5th Aug. 1890 ~ 27th Jan. 1956)

Based on the contributed material at SPO magazine, Apr. 2010 1]
Corrected on Feb. 2011

- 나는 아스파라거스를 원하면 신선한 것을 찾을 것이고, 없으면 통조림을 먹을 것이다.
레코드는 바로 그것, 통조림 음악이다. (Erich Kleiber) -

 아버지 또는 아들과 비교되는 것을 그리 좋아할 사람은 없을 텐데, 지휘계에서 불가피하게 그 점을 면할 수 없는 가장 대표적인 부자라면 클라이버란 이름이 바로 떠오른다.2] 두 사람 다 당대의 가장 뛰어난 지휘자 중 하나였지만, 나는 녹음으로 접하는 레파토리의 넓이와 해석의 방향에서 아버지 쪽에 손을 들어 주고 싶다. 주관적인 해석 방향은 그렇다 치고, 어차피 레코드로 두 사람의 연주를 들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질이 비슷하다면 양도 판단 기준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에리히는 1890년 빈에서 태어났다. 불행히도 9세 때까지 양친을 모두 잃었지만 제 2의 고향이 된 프라하에서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는데, 물리와 광물학 시간에 악보를 몰래 들여와서 후에 음악 학자 겸 작곡가가 된 동년배 한스 갈(Hans Gál)과 보았다니 음악에 대한 관심과 재능은 타고난 모양이다. 진지하게 지휘자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동기는, 역시 갈과 같이 들은 작곡자 지휘의 말러 교향곡 6번의 빈 초연이었다. 에리히의 생년이 늦은 편이기 때문에 말러에게 발터클렘페러처럼 직접 도움을 받지는 못했지만, 에리히에게도 말러는 은인인 셈이다.
 프라하의 독일 극장의 합창 보조지휘자로 발탁되었다가 1912년 다름슈타트 궁정 오페라의 제 3 지휘자로 지휘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가 맡은 주요 레파토리는 오페레타였는데, 경량급 음악에서도 그가 보여 준 날렵한 솜씨는 여기서 유래한다. 엘버펠트(현재 부퍼탈), 뒤셀도르프, 만하임 등을 거치면서 그는 1923년 프리다 라이더와 프리드리히 쇼르 같은 유명 배역으로 베를린에서 ‘피델리오’를 공연했는데, 베를린 국립 오페라의 음악 총감독 지위를 제안받고 결국 1934년까지 이 유력한 자리에 머무르게 된다. 여기서 그는 퍼셀 및 슈퇼첼 등 바로크 음악가부터 스트라빈스키 등 동시대 음악가까지 다루었으며, 특히 20세기 음악을 적극적으로 무대에 올렸다. 가장 유명한 것은 137회의 연습 후에 공연한 19251214일의 ‘보체크’ 초연이다. 당시 명실공히 세계 연주계의 중심이던 베를린에서도 그는 주목받고 있었으며, 1929년 찍은 유명한 사진에서 에리히는 가운데에 있다.3]
 그러나 그도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비켜갈 수는 없었다. 1934푸르트뱅글러가 힌데미트 사건으로 베를린 필의 수장에서 물러났으며 힌데미트는 터키로 떠났다. 에리히 자신도 ‘룰루’ 초연 허가를 받지 못한 후 독일을 뜨기로 결심하고, 같은 해 11월 베를린의 지위에서 물러난다. 그는 결국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테아트로 콜론(Teatro Colón)에 정착했는데, 이 곳은 1926년 처음 지휘하면서 아내 루스 굿리치(Ruth Goodrich)를 만나는 등 사적 인연도 있었으며 그 이후 매년 지휘했던 곳이다. 여기서 그는 독일 오페라 레파토리를 크게 확장했으며, 1949년까지 재직했다. 이 미주 시대에는 자신이 조직한 아바나 필하모닉의 상임이 되기도 했으며, 1944NBC 교향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재직하기도 했다.
 마침내 1948년 유럽으로 복귀했는데, Decca와 바로 독점 계약을 맺고 녹음을 개시했다. 코벤트 가든이나 피렌체 마지오 무지칼레, 빈 등 여러 중요한 곳에서 객원 지휘를 했으면서도 상임에 준하는 요청을 모두 거부했는데, 1954년 옛 베를린 국립 오페라의 요청을 받아들였다가 공산주의자들의 간섭 때문에 한 번도 공개 지휘를 하지 못하고 두 번째로 사임했다. 이 일이 그의 건강에 꽤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되며, 1956120일 쾰른 방송 교향악단과 마지막 공개 연주를 한 후 한 주일 뒤에 취리히의 호텔에서 급서했다. 평생 동안 모차르트를 좋아했던 그는 이렇게 모차르트 탄생 정확히 200주년에 타계하고 말았다.

 에리히의 관현악이 주는 인상은, 간단히 말해 19세기 후반에 태어난 오스트리아-독일계(당시 독일 부근에서 교육을 받은 헝가리나 체코계 등을 포함하여) 거장들 중 조지 셀을 빼면 전반적으로 가장 토스카니니에 근접한 편이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는 상당히 확연하게 고전파와 그 후의 작품들을 구별하여 다루며, 후자에서는 인 템포를 엄격하게 고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그는 오히려 토스카니니 이전 고전주의 정신의 대표자인 바인가르트너에 가깝다.
 그의 관현악곡 연주는 78회전 시기부터 죽던 해의 실황까지 다양하게 구해 들을 수 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고전 레파토리에서는 템포의 변화는 매우 적은 편이다. 사실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Telefunken)는 음질만 무시하면 요즘의 현대 악기 연주들과 구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1929년의 베토벤 2(DG)도 스케르초의 트리오에서 템포를 반으로 느리게 잡은 것 외에는 템포의 기본 개념은 요즘과 크게 차이가 없다. 반면 미완성 교향곡(Telefunken)은 두 악장 모두 음악이 고조되는 곳에서 템포를 약간 빠르게 잡은 점이 눈에 띄며, 신세계 교향곡(DG)1악장과 4악장에서는 몇 부분에서 템포를 몰아쳐서 대조를 강조하고 있다. 당시 (그리고 만년까지) 에리히의 템포 설정은 고전파와 그 이후에 차이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녹음들에서는 특히 베이스 성부가 잘 들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아무래도 당시 녹음 기술과 상관이 있는 듯하다. 물론 2차 대전 이후의 녹음들이 음향은 훨씬 좋지만, 젊은 시절의 에리히의 모습도 듣는 재미는 충분하다.
 2차 대전 이후의 녹음에서는, 콘서트헤보우를 지휘한 베토벤 6번에서 섬세한 그의 현악 조절 능력을 분명히 볼 수 있으며, 특히 2악장에서 기막히게 위력을 발휘했다. 1950년의 ‘영웅’은 음질, 밸런스, 약간 빠른 템포의 박진감 등 종합적으로 매우 훌륭하며 에리히를 대표한다고 할 만 하다. Decca 녹음 중에 하나 더 추가하자면 ‘비창’ 교향곡인데, 특이하게도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을 지휘했다. 이 연주는 에리히의 템포가 기계적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좋은 실례이다. 내가 들어 본 방송 녹음 중에서는 비창 교향곡의 다른 녹음, 슈베르트 9번의 일관된 긴장감, 모차르트 33,36,39번 및 오보 협주곡의 소박한 음향을 꼽고 싶다.
 에리히가 만든 음악을 말할 때 오페라를 뺄 수는 없다. 위의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만년만 빼고는 그는 거의 오페라 극장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상임을 맡은 경력도 그 쪽이 훨씬 길다. 평론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에 대한 감각이 탁월하다’거나 ‘천재적이다’라 지적한다. 그의 오페라 지휘 능력은 ‘피가로’에서 잘 알 수 있는데, 이 오페라 전체의 분위기 포착 감각이 기가 막힐 지경이다. ‘장미의 기사’에서는 오페라가 요구하는 감미롭고 약간 쓸쓸한 기운을 - 특히 원수 부인이 주인공인 1- 절묘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의 감각을 알려 주는 또 하나의 사례는 ‘마탄의 사수’다. 아들의 1973년 스튜디오 녹음(DG)을 해석의 독창성에서 첫째로 추천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에리히가 19553월에 쾰른 방송 교향악단과 방송용으로 만든 스튜디오 녹음을 들어 보면 기본적인 해석 구도가 사실상 같다. 게다가 이 녹음의 스타일은 실황 음향을 지향하지 않았으므로, 이 공통점들을 볼 때 아들이 아버지의 녹음을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녹음은 아들의 음반에 비해 음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슈트라이히가 녹음 당시 일시적으로 아픈 탓에 3막에서 앤햰의 로만체와 아리아가 빠진 점이 아쉽지만, 에리히의 팬에게는 놓치기 아깝다.

 에리히의 녹음은 전기 녹음 시대만 본다면, 78회전 시대는 Polydor(DG) 녹음 - Electrola 녹음 - Telefunken 녹음으로 27년 경에서 1938년까지 걸쳐 있지만 대부분은 독일에 있던 1935년까지 마쳤다. 그 후는 주로 테아트로 콜론과 미국의 방송 녹음들이고, 마지막으로 2차 대전 후에는 Decca 녹음과 방송국 녹음으로 나눌 수 있다.
 78회전 시대에 그가 녹음한 다악장의 소나타 작품은 모차르트의 교향곡 38,39, ‘아이네~, 드보르작 교향곡 9, 슈베르트 교향곡 8, 베토벤 교향곡 2(1929년과 1938년의 2)이다. 나는 모차르트 교향곡과 베토벤 2번의 나중 녹음을 아직 못 들었는데, 들어 본 중 특히 흥미로운 것은 위에서 언급한 ‘신세계’다. Telefunken 녹음 중 일부는 베를린 필의 ‘Im Takt der Zeit’ 시리즈의 3편으로 발매되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아이네~ ‘는 오히려 그래서 재미가 덜하다. ‘미완성’은 아쉽게도 복각 때문인지 소리가 너무 째져서 귀가 좀 피곤하다. 베를린 국립 오페라를 지휘한 베토벤 2번의 구녹음도 시대를 고려하면 ‘아이네~ ‘처럼 매우 객관적인 연주다. ‘신세계’와 마찬가지로 Naxos 복각으로 들을 수 있는데, 음질은 더 낡았다.
 2차 대전 이후의 녹음은 주로 Decca 녹음과 각지의 방송 녹음을 들 수 있다. Decca 음반 중 78회전인 런던 필 녹음보다는 콘서트헤보우와 빈 필 음반이 당연히 낫다. 당시 Decca의 모노랄 녹음은 경우에 따라 스테레오보다도 더 음향이 훌륭한데, 1950년의 ‘영웅’은 음질 및 밸런스가 매우 훌륭하다. 반면 쾰른 방송국의 녹음들은 평균적으로 울림이 좀 건조하지만, 모차르트 작품들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우며 Decca 녹음의 ‘인공성’은 덜하다.
 나는 전반적으로 암스테르담 Decca 세션의 3,5~7번이 그의 베토벤 중에서는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이 네 곡은 연도를 고려하면 녹음도 매우 좋으며,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뛰어나다. 그 중 3번과 6번을 고르고 싶은데, 3번은 빠른 템포를 선택한 현대 악기의 연주 중에서는 진짜로 훌륭한 연주다. 6번은 콘서트헤보우의 섬세한 현이 돋보이는데, 특히 2악장에서 기막히게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5,7번은 끝악장을 강조하고 있는 점은 마음에 들지만, 아무래도 3,6번보다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빈 필과 녹음한 3,9번은 의외로 크게 인상적이지 않은 편이다.
 그는 모차르트를 좋아했지만, Decca 녹음은 피가로 외에는 의외로 런던 필을 지휘한 교향곡 40번 하나뿐이고 그나마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지만 쾰른 라디오의 방송 세션인 33,39번과 슈투트가르트 라디오의 36번은 생기가 넘친다. Decca는 그에게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와 차이코프스키 4,6번을 녹음시켰는데 1949년의 4번은 음향이나 연주나 다 그렇지만 1953년의 6번은 소리도 훨씬 낫고 에리히의 낭만파 교향곡 해석 경향에서 중요한 연주다. 슈베르트 9번의 일관된 긴장감을 잃지 않는 쾰른 방송 녹음도 좋다. Hänssler에서는 보로딘 2번을 부자의 연주를 나란히 붙여 CD 한 장으로 발매했는데, 여기서는 아들의 연주 편이 더 나았다.
 협주곡 녹음은 드문데, 방송 녹음으로 모차르트 오보 협주곡,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구할 수 있다. 야니그로가 연주한 첼로 협주곡은 아쉽게도 이 뛰어난 연주자의 진가를 보여준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오보 협주곡은 이 협주곡의 즐거움을 매우 잘 전달한다.
 아쉽게도 Decca에서 스튜디오 레코딩으로는 그의 오페라는 두 개밖에 남아 있지 않다. 1955년 녹음한 그의 유일한 스테레오 녹음인 ‘피가로의 결혼’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작이며 이 곡의 추천 음반에 거의 항상 들어갈 정도로 훌륭한데, 이 연주를 성공시킨 데는 가수들보다 지휘자의 공이 돋보인다고 생각한다. ‘장미의 기사’는 가수들이 ‘피가로’보다 목소리가 배역에 좀 더 어울리지만 모노랄인 점이 못내 아쉽다. 두 녹음에서 빈 필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향은 매우 즐거운 덤이다. 1956년에 ‘피델리오’와 ‘장엄 미사’의 녹음을 예정해 놓았다고 하는데, 그가 서거하지만 않았어도 스테레오로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피델리오’는 ‘마탄의 사수’처럼 19561월의 방송용 스튜디오 녹음이 남아 있는데, 닐손 등 당시 최고의 가수들을 동원한 쾰른 방송국의 능력은 칭찬할 만 하지만 ‘마탄의 사수’와 같은 일관성 있는 설득력이 약간 부족한 흠이 있다. 역사적인 값어치가 있는 것을 고른다면 음질은 상대적으로 많이 떨어지지만 1951526일 칼라스를 주인공으로 피렌체의 테아트로 코뮤날레에서 공연한 ‘시칠리아의 저녁 기도’이다. 테아트로 콜론에서 공연한 바그너 실황들도 좀 있는 모양인데, 현재 구하기도 어렵고 음질이 매우 의심스럽다.

 아무리 재능을 타고났다고 해도 연습 없이는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아들인 카를로스도 그랬다고들 하지만, 에리히도 연습 벌레였다. ‘보체크’의 초연에서 137회 총연습을 한 것이나, 어느 유명한 오페라 극장에서 ‘장미의 기사’를 요청받았을 때 “총연습 세 번 필요합니다... , 오케스트라가 그 곡을 아주 잘 안다고요? 그러면 여섯 번 필요하겠군요”라 말한 일화가 남아 있다. 항상 “준비성이 모든 것이다”가 입버릇이었다고 전하듯이, 연습 없는 ‘즉흥 땜질’을 혐오했다고 한다. 에리히 정도의 ‘감각’을 지닌 사람도 실황에서 감각을 선보이는 데는 연습이 필요했던 것이다.

각주

  1. 공개에 동의해 주신 SPO Magazine에 감사드린다.
  2. 둘을 더 꼽자면, 오이스트라흐 부자와 제르킨 부자다.
  3. 오른편의 사진은 베를린의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1929년 환영회가 열렸을 때 찍었다.

The Resources

  • Record; liner notes(Testaments, Medici Arts, Naxos, Teldec, Decca... )
  • photo ; Medici Masters record, Decca

(c) 2010~, 이영록 & SPO; 링크는 자유지만, 인용시에는 미리 메일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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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ly contributed for SPO Magazine; Apr. 2010
Created ; 13th Feb.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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