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젤이나 뵘, 클라이버 등 독일계 지휘자의 연주만 들어서 그런지 비첨의 장식 솜씨는 대단히 신선하게 들린다. 밝고 명랑한 측면을 아주 잘 드러내 주었던 발터의 5번 연주도 비첨을 따돌리지는 못한다. 당시 정평이 나 있던 로열 필 목관악기의 뛰어난 솜씨도 좋지만, 해석 자체는 완전히 지휘자의 공임은 물론이다.

　이 녹음은 계획이 없다가 우연한 기회에 성사됐다. 1956년 봄에 지휘자와 로스 앙헬레스, 비욜링의 셋이 모두 뉴욕에 있었는데, 당시 HMV의 협력사였던 RCA가 재빨리 다른 캐스트와 오케스트라를 주선한 것이다. 비첨의 온화한 부드러움과 두 주역의 아름다운 음색이 딱 어울리며, 일반인이 생각하는 이 오페라의 낭만적이고 약간 감상적인 분위기에 가장 잘 부합한다. 가장 아쉬운 점이라면, 당시 RCA 기술진은 거의 모든 정규 녹음을 스테레오로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녹음은 모노랄이란 것이다.

　그의 모차르트 교향곡은 EMI에서 1991년 모차르트 200주기를 기념하여 발매한 런던 필하모닉과 연주한 SP 복각의 3장 세트 및 로열 필과 미국 Columbia에서 녹음한 후기 교향곡 전부가 유명하지만, 현재 쉽게 구할 수 있는 이 1957년 녹음을 예로 들어도 될 것이다. 3악장의 강약 및 표현이나 4악장 끝의 템포 처리는 대단히 흥미로우며, 진짜로 푸르트뱅글러 아니냐 질문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메시아 만큼은 아니래도 시대 연주 중심주의자들에게는 충분히 경악스러울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비첨과 딜리어스의 이름은 사실상 떼어 놓을 수 없다. 이 작곡가의 유명한 작품들에서 상당히 자주 보이는 널찍하며 한가로운 분위기를, 비첨은 부드러운 특유의 터치로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이 GRoC 발매로는 한 장 분량인데, 약 20년 전 처음 CD로 등장했을 때는 두 장 세트였다. 이번에 빠진 것도 다시 등장해 주기를 기대한다.
　

　시대 악기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만 봐 주면, 이렇게 재미있는 음반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아무리 현대 오케스트라용 편곡이라고 해도 심벌즈가 울리는 ‘할렐루야 코러스’ 등은 화려하다 못해 약간 유치하게까지 들린다. 개인적으로는 핸델처럼 장려한 음악을 만든 사람이라면 절대로 이런 스타일을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