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mas Beecham, Bart.(29th Apr. 1879~8th Mar. 1961) [ Aristocrat at podium ] Based on the
contributed material at SPO magazine, Nov. 2009
1]
비첨은 아직까지도 녹음으로 들을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영국 지휘자로 불리지만, 바비롤리 등의 다른 영국 지휘자들이 그렇듯이 우리 나라에서는 그렇게 큰 인기를 끌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한국 사람들에게 인기가 매우 높은 ‘4B(바흐,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와는 비첨 및 영국 지휘자들의 장기가 대체로 조금 거리가 있기 때문 아닐까. 토마스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아버지 조셉 비첨 경이
‘비첨 환약(Beecham's pills)’으로
떼돈을 긁어 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2]. 조셉은 대단한 음악
애호가로 연주회 스폰서가 자주 되었는데, 토마스도 정규 교육보다는
음악에 더 관심이 있었고 유럽으로 가서
오페라를 보고 올 정도였다지만 조셉은
가업을 물려 주기를 원해서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아버지가 없다고 결국
토마스는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1899년 조셉이 스폰서가
되어 할레 오케스트라와 리버풀 필하모닉
등의 단원을 영지로 초청했을 때, 지휘자가 급병으로
결장했다3]. 이 때 단원 중 토마스의 취미를
잘 알고 있던 한 명이 조셉에게 "아드님은 어떨까요?"라 제안했다고 한다. 조셉은 망설였지만 "좋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분은 자리를 뜨셔도
됩니다"라 동의했다. 결국 토마스는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고 작곡을 개인적으로 배우는데, 지휘는 사실 독학이나
다름 없었다.
1차 대전과 그로
인한 여파는 그에게 상당한 경제적
어려움을 초래해서, 아버지와
자신의 재산 문제로 인해 1920~22년
동안 연주 활동을 중단하고 경제적 상황을
해결하는 데 주력한다. 이
때문에 전에 자신이 통솔하던
오케스트라가 독립해 나가자,
런던 심포니와 자신의 기획을
실현하려다가 태생적으로 독립성이 강한5] 이
오케스트라와 의견이 맞지 않아 1932년 맬컴 사전트(Malcolm Sargent)와 함께 결국
런던 필하모닉을 창립한다.
78회전 시대에 그는 모차르트, 딜리어스, 시벨리우스
등 많은 녹음을 런던 필과 남겼다. 나치 독일의 연주 여행
초청을 받아들여서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6], 이 여행 때 나치 고위층의
행동을 보고 툴툴거렸다는 일화가 있듯이, 이후 단발 연주회나 녹음
말고 공식적 투어는 다시 갖지 않았다. 그는 탄압을 피해 망명한 푸르트뱅글러의
유태인 비서 베르타 가이스마르(Bertha Geißmar)를
채용하기도 하는데, 나치의
행동을 실감한 탓일 것이다. 비첨의 레파토리의 중심은 핸델, 하이든, 모차르트
및 베를리오즈를 위시한 프랑스
음악이었다고 봐야겠지만, 전반적으로
그는 레파토리에 대해 리히테르처럼
선택적이었지 ‘특정 작곡가는 연주하지
않는다’는 식은 아니었다. 베토벤에
대해 좀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몇 차례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모든 교향곡을 레파토리로
삼았으며, 러시아
음악도 상당히 자주 연주했던 모양이다. 발라키레프나
차이코프스키 등의 녹음도 있으며, R.코르사코프
‘세헤랴자데’는 정평이 있다. 이렇기 때문에 그가 다룬
작곡자의 수는 핸델부터 시작하여
스트라빈스키 등까지 매우 많다. 반면에 그가 음악적으로
성장한 1890년대에서 1900년대 초를 반영하여
관현악 편성 면에서는 낭만적이며, 시대악기 연주를 포함하는
‘학자풍’ 스타일을 싫어했다. 그는 핸델의 음악을
편집하여 발레 음악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Love in Bath’라는 녹음이
있다), 영국 지휘자 겸
작곡자 유진 구센스(Eugene
Goossens)가 현대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한 변태적이라고까지 불리는 메시아의
판본을 RCA 녹음에서 채용했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에서도 이런 태도는 마찬가지다.
비첨의 음반은 78회전
시기만 해도 300면
이상이며, 모노랄 시기
이후만 해도 상당히 양이 많아서 다 들어
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주요
레파토리의 상당수는 모노랄 이후에 다시
녹음했기 때문에, 유명한
‘마술 피리’ 녹음만 과감히 생략한다면 LP 시대 녹음만 언급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의 러시아 작품도 재미있다. 위에서 소개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EMI)과 같은 CD에
들어간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은 로열 필의
관악기군의 승리다. 재미있는
것은 우아함이 비첨의 트레이드 마크 같아
보이는데도, 예프게니
오네긴의 유명한 왈츠는 뭔가 리듬이 좀
뻣뻣하게 들린다는 점이다.
R.코르사코프 ‘세헤랴자데’(EMI)는 비첨의 밝은
현란함과 로열 필의 관악기군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한 연주다. 저명한 비평가 네빌 카두스(Neville Cardus)를 포함한 여러 권위자들은 비첨이 영국의 음악회 풍경을 지금처럼 만들어 놓은 중요한 사람이라 말한다. 한 예로 영국 청중들은 대체로 연주회 맨 마지막 곡이 끝나기 전까지는 박수를 치지 않는다는데, 젊은 시절 연주회에서 곡이 끝나기 전에 박수 치던 청중들을 향해 돌아서서 “여기가 아냐, 이 바보들아!”라 소리칠 정도로 청중을 교육시켰다고 한다. 이 정도로 괄괄한 성격을 지녔지만, 사람이 재치가 있고 귀족적이어서 청중과 일반 대중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런던에 현존하는 주요 콘서트 오케스트라 다섯 중 두 개를 창립했고, 만년 로열 필하모닉에 재직하다가 세상을 뜨자 수석 오보이스트 테렌스 맥도너(Terence McDonagh)가 “누가 토마스의 후임이 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계속 토마스를 위해 연주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오케스트라 단원에게도 사랑을 얻었다. EMI가 수많은 역사적 연주들을 갖고 있으면서도 비첨의 음반을 돌아가면서 계속 직접 발매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마 영국 회사로서 그에게 갖는 애정이리라.
(c) 2009 & 2010~, 이영록 & SPO; 링크는 자유지만, 인용시에는 미리 메일을 주시기 바랍니다. Originally contributed for SPO Magazine;
Nov. 2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