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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잘스 3중주단 - 티보/카잘스/코르토 (Thibaud/Casals/Cortot)

원문(프랑스어) ; 장 루비에(Jean Loubier)
from the liner note of EMI CHS 7 64057 2(3CD set)
번역 ; 이영록(1991, 1993년 Hitel 고전음악동호회 게시판에 처음 upload)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의 편성은 흔한 듀오(독주 악기와 피아노)와 훌륭한 현악 4중주 사이에 어려운 위치에 있다. 이러한 피아노 3중주가 우선 애호가의 형편에 맞고, 부르조아 살롱의 귀족 취향을 자주 지키는 이유는, 한 성부의 피아노와 다른 두 성부의 현 사이의 특유하고 매우 미묘한 균형에 있다. 솜씨는 서투르지만, 일요 음악가들은 독주 연주회들이 순수음악에 대한 갈증을 약간 막아 주는 동안 (더 잦은 관현악 연주회의 협연들에는 자주 가기는 더 어려우니까) 칭찬받을 만한 드문 열의로 서로 연락하며 연주했다. 역시 사람들은, 확실히, 더 쉬워 보이는 실내악을 가장 아마추어적인 연주가에서 가장 위대한 거장까지 많이 연주한다. 자크 티보(Jacques Thibaud)- 이미 19세에 바이올린의 달인이었다 - 3형제 중 둘(프랑시스 Francis 와 조셉 Joseph)과 함께, 세기의 끝 무렵 실내악 연주회를 가졌다(파리 플레이엘 홀 Salle Pleyel 에서 1899424일 베토벤의 3중주곡 하나를 연주했다).

   EMI Références CHS 7 64057 2(CD 3 set; 현재 폐반)    Great Recordings of the Century CDM 5 66986 2

   알프레드 코르토(Alfred Cortot)가 그의 단 하나의 이미지였던 '피아노의 비르투오조'- 그는 이 말을 싫어했다 - 만족하지 못하고, 프랑스에서 걸작들을 소개하면서 자주 지휘하다가#1, 1906년 테니스 모임에서 간접적으로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와 티보에게 3중주단을(이미 그들의 명성은 확고해서 결성하기만 하면 유럽에서 성공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자유롭게 결성하자고 제안했을 때, 그것은 결정적으로 그들의 높은 귀족적인 지위를 얻게 했고, 세 사람은 영원히 그들의 이름으로 3중주단의 일가를 이루었다1).
   참으로, 최소한 하이든 이래, 훌륭한 구성으로 쓰인 피아노 3중주곡은 항상 있었다. 그러나 3중주단의 결성은, 그 편성이 일정함에도 불구하고, 그 구성원들의 국경 안에서, 자주 국가나 영역 또는 마을 때문에, 제한된 그러한 경계 안에서 드물게만 들을 수 있었다. 카잘스 3중주단은#2 국제적 명성을 얻은, 첫째이고 유일한(데뷔 후 15년 동안)것이었다. 3중주단의 엄청난 명성은 역시 거기에서 왔다. 3중주단에게는, 레코드에 훌륭한 유산을 띄엄띄엄 남긴 다른 3중주단을 가려 버리는, 그처럼 전설적이고 신비적인 후광이 있다. 단지 카잘스 3중주단의 동시대에 결성된 유명한 것만으로 엄격히 제한하기 위해, 아돌프와 헤르만 부시(Adolf & Hermann Busch) 형제와 루돌프 제르킨(Rudolf Serkin)의 부시 3중주단(192050), 아르파트 제레스(Arpad Gerecz), 빌모스 팔로타이(Vilmos Palotai)와 조르지 솔샤니(George Solchany)의 헝가리 3중주단(193050)및 레나토 자네토비치(Renato Zanettovitch), 리베로 라나(Libero Lana, 1962년 아마데오 발도리노 Amadeo Baldorino로 교체)와 다리오 데 로자(Dario de Rosa)의 트리에스테 3중주단(1933)은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잘스 3중주단은 위의 다른 3중주단들을 절대적으로 능가한다. 그 중 하나(부시 3중주단)는 아주 연결된 가족 그 자체로#3, 당연히 자주 모이게 되었으며, 여기선 단지 아돌프 부시와 제르킨의 두 명만이 완전한 독주자이다. 다른 두 3중주단은 무엇보다도 실내악 주자로만 구성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상 거의 30년 동안 같이 연주하기 위해 모인, 독주자로서도 거장이었던 이 세 사람들의 - 후에 그들 각각의 믿기 어려운 다망한 경력은 그들을 갈라 놓았다 - 예와는 같지 않다. 거의 매년 세 명의 다양하고 바쁜 일정을 기적같이 잘 맞춰, 그들은 앙상블의 통일성의 정신을 극도로 달하게 했다; 바로 화려한 향연이었다. 모순이라면, 그들이 그렇게 유명하게 된 후에, 그러면서도 명백히 조금만 같이 연주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오래 같이 연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역사에는 바로 위와 같은 모순이 많으나, 오늘날 그들이 만들어 낸 업적의 진실이 흐려지는 동안 모순이 생겨난 것이다.

EMI-Electrola 1C 047 01148(LP; Haydn & Schubert)

   이들보다 더 닮지 않은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상상할 수 있을까? 경박하고, 매력적인, 게으른 그리고 '아마츄어'인 티보는 소품들에 친근감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영감으로부터 나온 깜짝 놀랄 정도의 '마술'로서 걸작들을 자유롭게 들려 주었다. 강력하게 마음 속 깊이 본능적이며 완고함까지도 갖고, 카잘스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거의 탐험 안 된 토양을 개척했다. 진지하고, 그 자신의 예술에 대해 심사숙고하며, 열정적인 바그네리안인 코르토는 단지 '그의 해석' 의 차원에서 만족하지 않고, 음악인에게 봉사하기보다 음악에 봉사하려는 야망을 가졌다. 그들 서로간의 애정과 함께 그 이상으로 강하게 대조된 개성과, 음악에 매우 열심인(다시 말해 음악 연주에 대해) 사랑과 함께, 그들의 대단한 융합의 빛나는 모순은 바로 거기에 있다. 나머지 두 사람 중 어느 한 명이 아니고, 코르토가(트리오 결성을 제안할 때처럼) 그들의 활동의 능동적인 주도권을 가졌음이 명백하다. 마찬가지로 코르토가 1919년 파리에서 명성 있는 에콜 노르말 드 뮈지크(École Normale de Musique)를 혼자서 설립하고, 조금 후 티보와 카잘스를 거기 초청했음도 자연스럽다.
   많은 연주회장에서 실제적으로 이 3중주단의 결성을 빛내고, 가장 아름다우며 음악가들에 의해 가장 많이 연구된 작품 중에서 확실히 최상의 것을 녹음하며, 아마츄어가 아닌 새로운 청중에게도 미지였던 대단함을 보여 줬으므로, 3중주단의 예외적인 성공은 거의 사회적 요구였다. 3중주단을 영원히 빛내는 이 영광은 우선 미적 질서 뿐 아니라 작품과 그들의 청중에 대해 솔직한 그들의 따뜻한 우정에 의한 윤리적 질서에 인함이 확실하다. 한 마디 덧붙이면, 3중주단은 그들의 지성과 정열, 청중들의 정숙함을 강요한 일관된 표현을 가지고 - 인간적이었다. 그들 셋의 사이에서, 일정한 루바토, 현의 포르타멘토, 피아노가 짜내는 거대한 응집력, 풍부하게 느껴지는 아티큘레이션은 결코 결점과 방종이 아니고, 자연스런 웅변이다. 그들의 아고긱은 살아 숨쉬는 여유를 잘 보여 준다. 모든 것, 그들의 위상은 음악사의 극적인 진보에 완벽한 적합함 아래에서 - 3중주에 완벽함이 별로 요구되지 않았을 때에도 - 그럼에도 거기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세 사람의 각각이 다른 둘에 봉사하고 그들에 의해 봉사받는, 마술 같고 소리의 설계가 줄타기 곡예사만큼이나 절묘한, 그들의 본능적, 즉각적이고 고려되지 않은 해석의 일치이다#4. 그들은 동시대 실내악단의 현대적 감각으로 일하지는 않았으나, 연주 여행 때마다 정열을 갖고 준비했다. 그들의 레퍼터리는 3중주의 형태에서 이름 있는 약 30명의 작곡가와 함께 약 120 이상의 작품이 있는 반면(그 중 '파파 하이든'의 것이 약 1/3이상을 차지한다), 넓지는 않아서, 33개의 작품만이 연주된 기록이 있다.

   3중주단은 오늘날에는 역사가 신비스럽기 때문에 신화적이다. 그들의 첫 연주회는 언제인지 명확하지 않다. 확실히 프랑스 릴(Lille)에서 1906128일 연주회가 있었지만, 프로그램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지막 연주회는 정확히 1933513,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축제 궁전에서, 그들의 세 장기곡인 베토벤의 7'대공', 슈베르트의 1B♭장조, 하이든의 G장조로 열렸다#5. 연주회의 총 목록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다. 우리의 세 친구들이 이러한 망각의 근원에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지나가 버린 듯 하다. 그러나 티보와 카잘스, 그들은 작가들을 통해 그들의 대단한 공통의 모험의 몇몇 윤곽을 많이 남겨 주었다2). 그와 같이, 신뢰할 수 있는 진정한 자료의 부족에서, 다른 사람들은 스페인 내란(1938)에 의해 생기거나, 그들의 선택 또는 2차대전 동안 각자의 위험에 의해 증폭된 정치적인 큰 불화에 의해#63중주단이 해산되었다고 설명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마지막 연주회는 1938년이 아니라 1933년에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1939년이나 1944년처럼 실제의 연도보다 정치적인 암시가 더 강한 연도를 주장하며,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간 잘못으로 인해, 해산 연도에 대해 우선 아무도 일치하지 않는다.
   193338년 동안, 카잘스는 바르셀로나의 그의 관현악단에서 매우 활발히 활동하며, 티보와 코르토처럼 그 기간 중 상당히 많은 수의 독주회를 갖는다. 그들은 거의 사전에 연락도 하지 않고, 먼 거리를 다닐 수 있는 비행기도 없던 30년대에 따로따로 세계를 연주 여행했다. 그들이 60대에 가까와지자, 그들이 젊어서 전성기에 있던 때처럼 더 이상 그들 자신의 일과 함께 3중주단으로 연주 여행을 할 수 없었다.

EMI-Electrola 1C 047 00857(LP; Beethoven's 'Archduke')

   확실하고 또 확인할 수 있는 일은, 1928(22회의 연주회로, 거의 1908년의 26회의 기록과 비슷하다)후 카잘스 3중주단은 29년에는 1회도 연주하지 않았고#7, 30년에는 단 2, 318, 324, 그리고 마지막 연주회를 가졌던 33년에는 3회의 연주회만을 베풀었다. 1928년 후 연주 횟수는 그렇게 급격히 줄었다. 가장 즉시 떠오르는 명백한 이유는 각각의 독주 연주가 놀랄 정도로 늘어서, 반대로 세 명이 모일 기회가 줄었다는 것이다. 카잘스 3중주단은 독일에(프랑크푸르트 Frankfurt am Main 에는 항상 갔다) 190913, 네덜란드에 1910년과 11, 이탈리아에 1908, 스위스에 190831, 스페인에 1908253), 벨기에에 190732, 영국에 192530년에 갔고#8, 연주회를 연 실제 전 경력 동안 프랑스에서 주로 연주했다(190613, 2228, 3033)4). 위의 연주 여행을 거의 철저히 조사하여 158회의 연주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 중 92회는 프로그램까지 추적할 수 있다. 그것은 이 3중주단의 16년 동안의 실제적 경력을 잘 대표한다.

   프랑코의 출현으로, 카잘스는 소름끼치는 그 때에 존경받을 만한 상아탑에 틀어박혀 버렸다#9. 그래서 티보와 코르토는 일시적으로 피에르 푸르니에(Pierre Fournier)3중주단을 재건했다. 카잘스는, 그의 침묵 속에 가로막혀, 그의 결심과 자존심을 주장하며 단지 실망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고, 아마 어떤 분노나 배반당했다는 느낌이 나이를 먹으며 희미해진 회상과 함께 그를 좀 '말이 많게' 만들었을 것이다#10. 그는 코르토와 마지막으로 프라드에서 1958710일 베토벤의 소나타 3A장조 op.6912개의 변주곡 op.66을 연주했다#11. 오히려 자기 중심적이고 명성에 민감한 외향적인 보르도 사람 티보는 67세 때 놀랍게도 그 자신에게만 의무를 질 수 있는 독주자를 칭찬하고 실내악 주자를 무시했다. 코르토와 가진 소나타 연주까지도 그랬을까(그 둘은 듀오로는 마지막으로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을 파리의 플레이엘 홀에서 19431126일과 30, 123일에 연주했다)? 코르토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고, 침묵하여 비난을 막아냈다. 그는 고독하게 일한다는 인상을 주었고, 오늘날 마지막으로 영원한 거작들을 해석했다. 그는 단지 특이함을 넘어서 상당히 교육적이고 항상 참고가 되는 음반을 남겼다. 그는 명성 있는 피아노 학교의 주인이었다(디누 리파티 Dinu Lipatti, 상송 프랑스와 Samson François, 마그다 탈리아페로 Magda Tagliaferro 등을 배출했다)5). 마지막으로, 그들이 만들어낸 음악이 영원하므로, 그들 셋 모두가 어떤 사람이건 무슨 상관이 있으랴!

   이 전집은 그들의 탁월함, 명백하고 유일한 진실이 되었다. 이 녹음은 오랫동안 접근 불가능한 경지의 것이었고, 신화에 다시 힘을 주었다. 자료들은6) 그들이 다른 곡들도 때때로 연주한 반면, 그들의 레퍼터리의 근본이 녹음된 단지 몇 개의 작품이었음을 보여준다. 다음에 그들의 레퍼터리가 있다. 그들은 청중 앞에서 다음 작품들만을 연주했다.

  • 하이든의 45개 중 하나(G장조, HXV/2, No.17)
  • 베토벤의 12개(작곡가 자신의 개작까지 포함하여)중 8개로, 변주곡 2개와 B♭장조의 알레그로를 포함하나, 교향곡 2번 D장조의 1805년 편곡(op.36b)은 제외된다.
  • 슈베르트의 2개 중, 놀랍게도 더 유명한 op.100(D.929)의 E♭장조를 연주하지 않고 B♭장조만 연주했다. B♭장조 D.28의 소나타 악장이나 노투르노 D.897은 연주하지 않았다.
  • 브람스의 4개(op.40의 호른 삼중주까지 넣어)중 하나(c단조).
  • 프랑크의 4개 중 첫째.

EMI-Electrola 1C 049 01408
(LP; Mendelssohn & Schumann's Trios)
(Photo by kind courtesy of
Clapia)

   대조적으로, 그들은 멘델스존의 2, 슈만의 3, 생상의 2개는 모두 연주했다. 그들의 동시대인 중에선, 라벨의 1914년작(초연은 가브리엘 비욤 Gabriel Willaume과 루이-레이몽 푀이야르 Louis-Raymond Feuillard, 알프레도 카젤라 Alfredo Casella1915128일 했다), 포레의 1923년 작을 로베르 크레틀리(Robert Krettly), 자크 파트(Jacques Patte), 타티아나 드 상체비치(Tatiana de Sánzevitch)가 파리의 국립 협회에서 1923512일에 초연한 후 627일 두 번째로 연주하며 레파토리로 했다#12. 그러나 그들은 마르티누의 '5개의 소품(1930)'이나 루셀(1902), 레거(1907)등은 연주하지 않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들이 모차르트의 8개 중 단 하나만(K.542), 그것도 단 한 번의 예외적인 기회에만 연주한 것이다. 그들은 에마누엘 무어(Emmanuel Moór, 헝가리, 18631931)3중주곡 1번을 세계 초연했고, 그와 같이 그들에게 헌정된 3중 협주곡도 세계 초연했다. 파데레프스키가 사람들을 '무어의 위험'에 대해 경계하도록 했을 때에도, 무어에 대한 카잘스의 막기 어렵고 '공격적이기까지 하던' 우정을 생각하면, 그들이 마찬가지로 무어의 3중주곡 2C장조 op.89(1909)도 초연했음이 거의 확실하다. 그들은 베토벤의 3중 협주곡을 자주 연주했다. 또한 3중주단의 레퍼터리는 원래 3중주곡으로 작곡된 곡보다 더 많다는 것과, 특히 5중주(브람스와 프랑크의 것)처럼 더 큰 앙상블에서도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3중주단의 명성과 권위에 대해, 그들의 레퍼터리의 한계와 부족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그들의 사정을 볼 때, 그 이상 더 넓히긴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이 아직 있다; 이 남아 있는 녹음은 그들의 레퍼터리 중에서 아주 일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사람들은 카잘스 3중주단이 3중주곡으로 된 모든 레퍼터리의 화신임을 고집한다. 바로 거기에 이 3중주단의 승리가 있다. 카잘스 3중주단이 남긴 어떤 해석이라도, 다른 모든 해석을 다 합친 것만큼이나 위대했던 것이다.

* 원주(原註)

  1. 여기서는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의 순서로 모든 연주자들을 말했다.
  2. 자크 티보, "바이올린은 말한다(Un Violon Parle)", 장-자크 도리앙에 의해 수집된 추억들(Souvenirs recueillis par Jean-Jacques Dorian, Édition du Blé qui lève), 파리, 1947. 파블로 카잘스, "앨버트 E.칸에 이야기한 나의 삶(Ma vie racontée Albert E. Kahn)", Albert E. Kahn, Édition. Stock/Musique, 파리, 1970, & "호세 마리아 코레도르의 파블로 카잘스와 가진 대화(Conversations avec Pablo Casals de Jose-Maria Corredor)" Édition. Albin Michel, 파리, 1955, reédition Pluriel/Hachette, 파리, 1982(장 프랑스와 라비 Jean-Francois Labie와 필립 모랭 Philippe Morin에 의해 주석이 붙어 있다)
  3. 티보, 카잘스, 코르토가 파우 카잘스 관현악단을 지휘한 외제느 이자이(Eugène Ysaÿe) 와 함께 바르셀로나에서 베토벤의 3중 협주곡을 연주한 것은, 카잘스의 회상에 따르면 1927년(베토벤 100년제)이지만, 실제로는 1925년 4월 19일이었다. (역자주; 위의 주 2의 A.E.Kahn의 저서는 도서출판 예음에서 "나의 기쁨과 슬픔, 파블로 카잘스"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책의 p.152∼155에서 이 내용을 볼 수 있다)
  4. 파리의 연주회의 프로그램은 모두 알 수 있고, 다른 곳에서 열린 연주회의 프로그램은 대개 1922년 이후의 것을 알 수 있다.
  5. 베르나르 가보티(Bernard Gavoty) 는 코르트의 동기와, 경력의 실제를 묘사한다. "Alfred Cortot", Buchet/Chastel, 파리, 1965.
  6. 자료들은 특히 다음에서 얻었다; 파리, 장 코르토(Jean Cortot) - 코르토의 아들, 국립 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 로잔(Lausanne, 코르토가 이 곳에 살았다), 자크 뷔르데 (Jacques Burdet, 음악학); 제네바, 클로드 타폴레(Claude Tappolet, 역사)

# 역자주

  1. 코르토는 저명한 바그네리안으로 바이로이트의 보조 지휘자로 있었고, 파리에서 24세 때 '신들의 황혼'을 초연했고, 이 외에 '파르지팔', 베토벤의 '장엄 미사',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을 파리 초연했다.
  2. 코르토가 이 3중주단의 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고려하면 아마 '코르토 3중주단'이라 칭해야 하겠지만, 통칭대로 카잘스 3중주단으로 칭한다.
  3. 제르킨이 아돌프 부시의 딸 이레네(Irene)와 결혼한 이야기다. 자세한 것은 이 홈페이지의 제르킨 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4. 코르토는 그들이 미리 치밀하게 연습을 하지 않은 데서 그들의 음악이 자발성을 가졌다고 말한다.
  5. 아마 브람스 탄생 100년제였을 것이다.
  6. 2차 대전 동안 카잘스는 나치에 항의하여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프라드에서 칩거하며 공개 연주를 하지 않았다. (푸르트뱅글러가 카잘스를 1933년 브람스 100년제에 베를린으로 초청했으나 실패했다고 하며, 카잘스 자신도 나치 집권 이래 독일에서 연주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코르토는 공개적으로 나치에 협력했고, 종전 후는 이 때문에 대부분 스위스에서 반 은퇴 생활을 보내야 했다.
  7. 브람스의 2중 협주곡의 녹음 날짜에서 알 수 있듯이 세 사람은 1929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 모였다. 그러나 3중주 연주회를 가졌는지는 역자가 얻을 수 있는 자료에서는 알 수 없다.
  8. 이 런던 여행이 중요하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이들의 3중주곡 녹음들은 모두 런던에서 1926~28년 녹음했기 때문이다.
  9. 카잘스가 은퇴해 있던 남프랑스 프라드(Prades)를 뜻한다.
  10. 카잘스는 자신이 독일 점령 기간 중 프라드에서 궁핍하게 지내고 있을 때, 티보와 코르토가 알면서도 도와 주지 않은 데 대해 몹시 분개하고 있었다. 대전 후 코르토가 프라드로 찾아와 용서를 구했을 때, 그는 용서해 주었다(Kahn의 저서 참조). 그러나 티보는 끝내 사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잘스와 티보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마침내 카잘스는 꺼져 버리라고 소리질렀다고 한다. 이들을 위해 참으로 슬픈 종말이 아닐 수 없다.
  11. 이 프라드 연주는, 카잘스가 젊은 아내 마르티타에게 결혼 선물을 물어보자 마르티타가 "실황으로 세 사람의 3중주를 듣고 싶어요"라 대답했기 때문에 성사되었다고 한다. 티보는 이 때 비행기 사고로 이미 세상을 뜬 후였기 때문에, 코르토만 프라드로 와서 카잘스와 연주할 수 있었다. 기막힌 결혼 선물이었음은 물론이다.
  12. 그들이 이 곡을 연주한 후 포레와 함께 찍은 사진이 아직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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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original ; 1991~ , Jean Loubier & EMI Classics
(c) translation from French 1991~ , by
Youngrok LEE ; 링크는 자유지만, 저작권 문제 때문에 인용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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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ed ; 20th Nov. 2002
Last update ; 13th Jun.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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