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잘스 3중주단 - 티보/카잘스/코르토 (Thibaud/Casals/Cortot) 원문(프랑스어) ; 장
루비에(Jean
Loubier)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의 편성은 흔한 듀오(독주 악기와 피아노)와 훌륭한 현악 4중주 사이에 어려운 위치에 있다. 이러한 피아노 3중주가 우선 애호가의 형편에 맞고, 부르조아 살롱의 귀족 취향을 자주 지키는 이유는, 한 성부의 피아노와 다른 두 성부의 현 사이의 특유하고 매우 미묘한 균형에 있다. 솜씨는 서투르지만, 일요 음악가들은 독주 연주회들이 순수음악에 대한 갈증을 약간 막아 주는 동안 (더 잦은 관현악 연주회의 협연들에는 자주 가기는 더 어려우니까) 칭찬받을 만한 드문 열의로 서로 연락하며 연주했다. 역시 사람들은, 확실히, 더 쉬워 보이는 실내악을 가장 아마추어적인 연주가에서 가장 위대한 거장까지 많이 연주한다. 자크 티보(Jacques Thibaud)는 - 이미 19세에 바이올린의 달인이었다 - 3형제 중 둘(프랑시스 Francis 와 조셉 Joseph)과 함께, 세기의 끝 무렵 실내악 연주회를 가졌다(파리 플레이엘 홀 Salle Pleyel 에서 1899년 4월 24일 베토벤의 3중주곡 하나를 연주했다).
알프레드
코르토(Alfred Cortot)가
그의 단 하나의 이미지였던 '피아노의
비르투오조'에 - 그는 이 말을 싫어했다 - 만족하지 못하고, 프랑스에서 걸작들을
소개하면서 자주 지휘하다가#1,
1906년 테니스 모임에서 간접적으로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와 티보에게 3중주단을(이미
그들의 명성은 확고해서 결성하기만 하면
유럽에서 성공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자유롭게 결성하자고
제안했을 때, 그것은
결정적으로 그들의 높은 귀족적인 지위를
얻게 했고, 세 사람은
영원히 그들의 이름으로 3중주단의
일가를 이루었다1).
이들보다
더 닮지 않은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상상할
수 있을까? 경박하고, 매력적인, 게으른
그리고 '아마츄어'인 티보는 소품들에
친근감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영감으로부터 나온 깜짝 놀랄 정도의 '마술'로서
걸작들을 자유롭게 들려 주었다. 강력하게 마음 속 깊이
본능적이며 완고함까지도 갖고, 카잘스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거의 탐험 안 된 토양을
개척했다. 진지하고, 그 자신의 예술에 대해
심사숙고하며, 열정적인
바그네리안인 코르토는 단지 '그의
해석' 의 차원에서
만족하지 않고, 음악인에게
봉사하기보다 음악에 봉사하려는 야망을
가졌다. 그들 서로간의
애정과 함께 그 이상으로 강하게 대조된
개성과, 음악에 매우
열심인(다시 말해 음악
연주에 대해) 사랑과
함께, 그들의 대단한
융합의 빛나는 모순은 바로 거기에 있다. 나머지 두 사람 중 어느 한
명이 아니고, 코르토가(트리오 결성을 제안할
때처럼) 그들의 활동의
능동적인 주도권을 가졌음이 명백하다. 마찬가지로 코르토가 1919년 파리에서 명성 있는
에콜 노르말 드 뮈지크(École
Normale de Musique)를 혼자서 설립하고, 조금 후 티보와 카잘스를
거기 초청했음도 자연스럽다.
이
3중주단은 오늘날에는
역사가 신비스럽기 때문에 신화적이다. 그들의 첫 연주회는
언제인지 명확하지 않다. 확실히
프랑스 릴(Lille)에서 1906년 12월
8일 연주회가 있었지만, 프로그램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지막 연주회는
정확히 1933년 5월 13일,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축제 궁전에서, 그들의 세 장기곡인
베토벤의 7번 '대공', 슈베르트의
1번 B♭장조, 하이든의 G장조로
열렸다#5. 연주회의 총 목록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다. 우리의
세 친구들이 이러한 망각의 근원에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지나가 버린 듯 하다. 그러나 티보와 카잘스, 그들은 작가들을 통해
그들의 대단한 공통의 모험의 몇몇 윤곽을
많이 남겨 주었다2).
그와 같이, 신뢰할
수 있는 진정한 자료의 부족에서, 다른 사람들은 스페인
내란(1938)에 의해
생기거나, 그들의 선택
또는 2차대전 동안
각자의 위험에 의해 증폭된 정치적인 큰
불화에 의해#6
이 3중주단이 해산되었다고
설명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마지막 연주회는 1938년이
아니라 1933년에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1939년이나 1944년처럼
실제의 연도보다 정치적인 암시가 더 강한
연도를 주장하며,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간 잘못으로 인해,
해산 연도에 대해 우선 아무도
일치하지 않는다.
확실하고 또 확인할 수 있는 일은, 1928년(22회의 연주회로, 거의 1908년의 26회의 기록과 비슷하다)후 카잘스 3중주단은 29년에는 1회도 연주하지 않았고#7, 30년에는 단 2회, 31년 8회, 32년 4회, 그리고 마지막 연주회를 가졌던 33년에는 3회의 연주회만을 베풀었다. 1928년 후 연주 횟수는 그렇게 급격히 줄었다. 가장 즉시 떠오르는 명백한 이유는 각각의 독주 연주가 놀랄 정도로 늘어서, 반대로 세 명이 모일 기회가 줄었다는 것이다. 카잘스 3중주단은 독일에(프랑크푸르트 Frankfurt am Main 에는 항상 갔다) 1909∼13년, 네덜란드에 1910년과 11년, 이탈리아에 1908년, 스위스에 1908∼31년, 스페인에 1908∼25년3), 벨기에에 1907∼32년, 영국에 1925∼30년에 갔고#8, 연주회를 연 실제 전 경력 동안 프랑스에서 주로 연주했다(1906∼13, 22∼28, 30∼33년)4). 위의 연주 여행을 거의 철저히 조사하여 158회의 연주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 중 92회는 프로그램까지 추적할 수 있다. 그것은 이 3중주단의 16년 동안의 실제적 경력을 잘 대표한다. 프랑코의 출현으로, 카잘스는 소름끼치는 그 때에 존경받을 만한 상아탑에 틀어박혀 버렸다#9. 그래서 티보와 코르토는 일시적으로 피에르 푸르니에(Pierre Fournier)와 3중주단을 재건했다. 카잘스는, 그의 침묵 속에 가로막혀, 그의 결심과 자존심을 주장하며 단지 실망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고, 아마 어떤 분노나 배반당했다는 느낌이 나이를 먹으며 희미해진 회상과 함께 그를 좀 '말이 많게' 만들었을 것이다#10. 그는 코르토와 마지막으로 프라드에서 1958년 7월 10일 베토벤의 소나타 3번 A장조 op.69와 12개의 변주곡 op.66을 연주했다#11. 오히려 자기 중심적이고 명성에 민감한 외향적인 보르도 사람 티보는 67세 때 놀랍게도 그 자신에게만 의무를 질 수 있는 독주자를 칭찬하고 실내악 주자를 무시했다. 코르토와 가진 소나타 연주까지도 그랬을까(그 둘은 듀오로는 마지막으로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을 파리의 플레이엘 홀에서 1943년 11월 26일과 30일, 12월 3일에 연주했다)? 코르토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고, 침묵하여 비난을 막아냈다. 그는 고독하게 일한다는 인상을 주었고, 오늘날 마지막으로 영원한 거작들을 해석했다. 그는 단지 특이함을 넘어서 상당히 교육적이고 항상 참고가 되는 음반을 남겼다. 그는 명성 있는 피아노 학교의 주인이었다(디누 리파티 Dinu Lipatti, 상송 프랑스와 Samson François, 마그다 탈리아페로 Magda Tagliaferro 등을 배출했다)5). 마지막으로, 그들이 만들어낸 음악이 영원하므로, 그들 셋 모두가 어떤 사람이건 무슨 상관이 있으랴! 이 전집은 그들의 탁월함, 명백하고 유일한 진실이 되었다. 이 녹음은 오랫동안 접근 불가능한 경지의 것이었고, 신화에 다시 힘을 주었다. 자료들은6) 그들이 다른 곡들도 때때로 연주한 반면, 그들의 레퍼터리의 근본이 녹음된 단지 몇 개의 작품이었음을 보여준다. 다음에 그들의 레퍼터리가 있다. 그들은 청중 앞에서 다음 작품들만을 연주했다.
대조적으로, 그들은 멘델스존의 2개, 슈만의
3개, 생상의
2개는 모두 연주했다. 그들의 동시대인 중에선, 라벨의 1914년작(초연은 가브리엘 비욤 Gabriel Willaume과 루이-레이몽 푀이야르 Louis-Raymond Feuillard, 알프레도
카젤라 Alfredo Casella가
1915년 1월
28일 했다)과, 포레의 1923년
작을 로베르 크레틀리(Robert
Krettly), 자크 파트(Jacques
Patte), 타티아나 드 상체비치(Tatiana de Sánzevitch)가
파리의 국립 협회에서 1923년
5월 12일에
초연한 후 6월 27일 두 번째로 연주하며
레파토리로 했다#12.
그러나 그들은 마르티누의 '5개의 소품(1930)'이나
루셀(1902), 레거(1907)등은 연주하지 않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들이 모차르트의 8개
중 단 하나만(K.542), 그것도
단 한 번의 예외적인 기회에만 연주한
것이다. 그들은
에마누엘 무어(Emmanuel Moór,
헝가리, 1863∼1931)의 3중주곡
1번을 세계 초연했고, 그와 같이 그들에게
헌정된 3중 협주곡도
세계 초연했다. 파데레프스키가
사람들을 '무어의 위험'에 대해 경계하도록 했을
때에도, 무어에 대한
카잘스의 막기 어렵고 '공격적이기까지
하던' 우정을 생각하면, 그들이 마찬가지로 무어의
3중주곡 2번
C장조 op.89(1909)도
초연했음이 거의 확실하다. 그들은
베토벤의 3중 협주곡을
자주 연주했다. 또한 3중주단의 레퍼터리는 원래 3중주곡으로 작곡된 곡보다
더 많다는 것과, 특히 5중주(브람스와
프랑크의 것)처럼 더 큰
앙상블에서도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c) original ; 1991~ , Jean
Loubier & EMI Classics Created ; 20th Nov. 2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