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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SALS, Pablo(29th Dec. 1876~22nd Oct. 1973 )

[ The most important musician in 20th century ]

(First appeared at Classical Forum of Freechal)

   내가 20세기의 연주가 중 10명을 골라야 한다면, 아마 족히 하루는 생각해야 할 것이며 결과에 객관성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명만 고르라면 의외로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역사적인 중요성과 연주력, 오랜 연주 경력과 다른 연주가들에게 미친 영향을 객관적으로 고려한다면, 나는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외의 다른 사람을 말할 수는 없다. 그야말로, 작곡가 드보르작이 했던 불평인 "첼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중음역은 훌륭하지만 저음역은 웅웅거리기만 하며 고음역은 코먹은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란 말을 20세기적인 의미에서 처음 극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 담배 피는 카잘스. 그는 평생 파이프 담배를 입에서 떼지 않았다.

 

 

 

 

 

 

 

 

 

 

 

 

  첼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이상 이름을 들어보았을 카잘스는 18761229일 스페인 카탈로니아(Catalonia)의 벤드렐 태생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라면 김주은 님의 대단한 카잘스 사이트를 참고하는 편이 낫지만, 여기서도 좀 설명하기로 하자. 아버지는 교회의 오르간 주자였으며, 어머니는 아버지의 제자였다. 어린 파블로는 당연히 피아노, 오르간 등 여러 악기를 배웠으나, 그는 연주회에서 들었던 첼로에 매혹되어 첼로로 바꾸었다. 바르셀로나의 음악 학교에서 불과 12세 때부터 첼로의 주법을 개혁하기 시작했고, 13세 때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발견'했다. 그 후 스페인 왕실과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파리로 가서, 1898년 명지휘자 샤를르 라무뢰(Charles Lamoureux)와 그의 오케스트라(현재 라무뢰 오케스트라이다)의 연주회에서 랄로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여 독주자로 데뷔했다. 파리의 음악가들과 청중들은 그가 어떤 연주력을 지녔는지 당장 알아보았다. 라무뢰는 카잘스를 처음 본 오디션에서 피아노 반주로 랄로의 협주곡을 들어보고 눈에 눈물이 괸 채로 "젊은이, 당신의 연주는 참으로 훌륭합니다. 우리의 다음 연주회에서 연주해 주십시오."라 말했으며, 연주회는 카잘스 왈 "내가 꿈에도 기대하지 못했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이 연주회와 함께 그의 앞날은 탄탄대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당장 그는 파리에 오던 여러 연주가들과 같이 연주했고, 무엇보다 알프레드 코르토(Alfred Cortot), 바이올린의 자크 티보(Jacques Thibaud)와 오래 유지한 교우 관계는 지금까지 전설적인 3중주단 활동으로 남았다. 고향인 바르셀로나에서 파우 카잘스 오케스트라(Orquesta Pau Casals)를 조직하여 지휘 음반도 남길 정도로 지휘자로서도 활발히 활동했으나, 1937~38년의 스페인 내란으로 인해 프랑스 남부 프라드(Prades)에 정착했다. 하지만 1940년 히틀러가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미국으로 이주하지 못하고, 2차 대전 동안 사실상 프라드에 고립되어 어렵게 지내야 했다. 자유 프랑스가 회복되자, 전승국들 사이에 프랑코 독재 정부를 승인하는 분위기가 퍼지는 데 항의하여 1947년 이후 다시 프라드로 은거해 버렸다.
  하지만 그 은거는 길지는 못했다. 부다페스트 4중주단의 제 2 바이얼리니스트며 그와 매우 친했던 알렉산더 '사샤' 슈나이더(Alexander 'Sasha' Schneider)가 카잘스에게 미국에서 '천문학적인 연주료'로 연주회를 제안했다. 카잘스는 당연히 거부했지만, 알렉산더는 막무가내였다. "당신이 안 나오면 우리가 거기로 가면 되잖아요?" 프라드 바흐 페스티벌이 이렇게 탄생했다. 1950년의 바흐 200주기를 기념하여 첫 페스티벌을 열었고, 1966년까지 카잘스는 참여했다.
  1956~57년부터 카잘스는 푸에르토 리코(Puerto Rico)에 정착했다. 제자이자 젊은 아내 마르티타(현재 맨해튼 음악학교 교장이다)의 집이 거기 있었기 때문인데, 그 이후 푸에르토 리코의 산 후안 페스티벌, 아돌프 부시와 친구 루돌프 제르킨이 주축이던 말버러 페스티벌에서 주로 활동했다. 1957년의 관상동맥 혈전증을 극복하여, 197310월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지휘, 독주, 그리고 유엔 회장과 백악관 연주 등 자신의 인간에 대한 신념을 알리는 활동에도 열중했다. 연주자로서 역사적 중요성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보인 따스한 태도 등 인격에서도 그만큼 존경받은 연주자는 달리 찾아보기 힘들다. 자신의 말처럼, "나는 내 첼로에게만 머리를 숙인다"는 태도로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을 듣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역사적 일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중요한 일은 단연 첼로 주법의 개혁이다. 그 자신의 말을 "앨버트 E.칸에 이야기한 나의 삶(Ma vie racontée Albert E. Kahn)"에서 인용하면(아쉽게도 요즘 한국어 번역판이나 영어판 모두 절판이라고 한다)

  바르셀로나의 학교에 있을 무렵, 나는 그때까지 교습 받아온 첼로 주법에 어떤 변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겨우 12세에 불과했지만 어떤 사물에 관해서는 어린아이에게도 분명한 통찰력이 있는 것이다. 나는 첼리스트들이 뻣뻣해진 팔과 팔꿈치를 옆구리에 꼭 붙이고 연주하는 방법이 왠지 불편하고 부자연스럽게 여겨졌다. 사실 우리는 첼로 연습을 할 때 활을 쥔 팔 겨드랑이에는 책을 끼고 했던 것이며, 그것이 나에게는 어리석게 보였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연습할 때는 팔을 자유롭게 하고, 억지로 만든 꽉 조이는 자세를 취하지 않는 방법으로 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또한 핑거링과 왼손의 동작에도 개선할 여지가 있다고 느꼈다. 그 당시에는 음을 짚을 때 손을 모으고는 그것을 끊임없이 아래 위로, 손가락으로만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나는 손을 쫙 펴고 멀리까지 늘려 보았다. 그랬더니 그때까지 모든 연주자들이 3도까지밖에 짚지 못하던 것이, 손을 움직이지 않고도 4도를 짚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내가 학교에서 그러한 나의 새로운 연주법들을 적용하기 시작하자 학생들 간에 소요가 일었고 선생님도 처음에는 매우 놀랐다. 그러나 그는 매우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설명하자 이상하게 보이는 나의 연주법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쨌든 오늘날에는 아무도 첼로를 배울 때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배우지는 않는다.

  이런 공적 때문에, 그를 '현대 첼로 주법의 완성자''현대 독주 악기로서 첼로가 갖는 높은 위치를 비로소 확립한 인물'로 평가한다. 이 공적을 당대의 사람들도 금방 깨달았다. 위 인용의 첫 문단에서 카잘스가 겸손하게도 암시만 했지만, 그는 실제로 첼로의 활 쓰는 방법(운궁법)을 완전히 바꿔 놓았을 뿐 아니라 그 합리적이고 예술적인 사용으로 '활의 왕자'로 불렸다. 첼리스트들 뿐 아니라 바이올리니스트들까지 그의 운궁법을 참고했다고 한다. 이런 연주력 때문에 그는 곧 후고 베커(Hugo Becker)등 당시의 쟁쟁한 다른 첼리스트들을 가려 버리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중요한 일은, 역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재발견을 들 수 있다. 사실 이 곡이 완전히 잊혀지지는 않았으며 당대의 명 첼리스트들이 가끔씩 연주해 왔지만, 무엇보다도 지금처럼 첼로의 표준 레파토리에 넣고 훌륭한 예술성을 대중에게 인식시킨 공로는 오로지 그에게 돌려야 한다.

.. 그리고 우리는 부두 근방의 오래된 악보 상점에 들어갔다. 나는 많은 스코어들을 여기저기 훑어보기 시작했다. 불현듯 낡고 색이 바랜 한 묶음의 스코어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첼로를 위한 무반주 모음곡'이었다!. 나는 놀라움으로 스코어를 읽었다. 첼로를 위한 여섯 개의 모음곡. 그 제목 속에는 어떤 마술과 신비가 숨겨져 있을까 생각했다. 나는 결코 모음곡 같은 것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고 아무도, 나의 선생님들조차, 그 곡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 모음곡들을 마치 왕관에 달린 보석들처럼 가슴에 꼭 안고 급히 집으로 돌아와서는 내 방에 들어가 그 음악에 빠져 들었다. 나는 그 음악을 읽고 또 읽었다. 그 때 나는 13세였지만, 그후 80년 동안 그것을 처음 대했을 때의 놀라움은 언제나 생생하게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그 곡은 전혀 알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나는 그 곡을 억누를 수 없이 흥분하여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곡은 이제 나의 가장 귀중한 음악이 되었다.
  나는 그 후 12년 간 매일매일 그 곡을 연구하고 공부했다. 정말로 12년이 지나고 내가 25살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그 중의 한 곡을 청중 앞에서 연주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EMI의 베토벤 첼로 소나타 LP. 사진은 Erich Auerbach.
그는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은 한 번만 녹음했지만 베토벤 소나타는 전곡을 두 번 녹음했는데, 이 사진은 HMV 첫 녹음의 Dacapo 재발매 자켓이다. 1,2,4,5번은 호르쇼프스키가, 3번은 슐호프가 피아노를 맡았다.

 

 

 

 

 

 

 

 

 

 

 마지막으로, 실내악에 대한 공적을 뺄 수 없다. 젊을 때엔 하루에 두 번 연주회를 열었을 정도로 바쁘게 지냈지만, 공식 연주 시즌이 끝나는 여름에 1개월간 당시의 최대의 떠오르는 별들인 피아노의 코르토, 티보와 일정을 맞춰 트리오 활동을 하기로 1905~06년 합의했을 때, 이들의 명성은 1933년까지 계속한 이 활동으로 결정적으로 높아졌다. 거장 세 명이 오프 시즌에 모여 연주하는 트리오의 매력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대중은 이 트리오 덕에 처음 인식했다는 평도 듣는다. 다행히 레코드가 제법 남아 있지만, 아쉽게도 전기 녹음 초기인 1920년대 말이라 음질은 꽤 낡았다. 이 트리오는 실질적으로 코르토가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하는데, 1930년대 초반이 되자 더 이상 각자의 스케줄을 맞추기가 어려워졌고 조금 후 카잘스가 프라드로 은거하자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한다. 자세한 설명은 카잘스 트리오 항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EMI에서 트리오 전집을 발매했을 때 장 루비에(Jean Loubier)가 쓴 훌륭한 불어 해설을 내가 직접 번역했다.

EMI의 최근 발매된 바흐 무반주 모음곡 음반. Pearl이나 Naxos 등 전문 복각 회사에서도 많이 내놓았다.

 그의 음반은 1915년부터 있다고 하는데, 첼로 연주와 지휘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음반은 아무래도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 6(1936~39, EMI)을 들어야 할 것이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이 음반을 '랩소딕한 해석'이라 말했는데, 사실 매우 풍부한 표현으로 가득하다. 이 음반은 아마 고전음악 레코드들 중 유명하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지 않나 싶다. 카잘스의 체코 연주회 후 지휘자 조지 셀이 제안해서 성립되었다고 하는 드보르작의 협주곡(EMI, 1938)도 굴곡이 매우 큰 연주가 인상적이고(아쉽게도 녹음은 연도를 고려해도 그리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트리오 녹음들은 베토벤 '대공'을 포함해 다섯 곡이 있는데(EMI, 1926~29) 그들의 낭만적인 음악을 잘 알 수 있다.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 5곡과 브람스 첼로 소나타 2번이 HMV(EMI)에 남아 있으며(1930~36), 브람스의 2중 협주곡(1929)과 보케리니 협주곡(1936; 아직 EMI 본사에서 CD로는 발매하지 않았다), 브루흐 '콜 니드라이'2차 대전 직후의 엘가 협주곡(1945)을 합하면 전성기였던 78회전 음반 시절의 중요한 음반은 거의 모두 EMICD로 발매해 놓았다.
  그 이후는 주로 미국 Columbia에서 녹음했는데, 아마 알렉산더 슈나이더의 영향일 것이다. 이 시기의 녹음은 오히려 지휘가 더 많은데, Sony의 카잘스 에디션으로 CD 10여 장 정도로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다. 루돌프 제르킨과 베토벤 소나타 5곡 재녹음, 브람스 6중주곡 1, 슈만의 첼로 협주곡(지휘는 오먼디), 앙코르집, 여러 실내악곡 등 유명한 예술가들과 같이 한 실황 녹음이 많다. 독특한 연주회로는 케네디가 초청하여 백악관에서 한 연주회(1961년 실황)가 있다. 원반에는 카잘스 자신이 자신의 일생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인터뷰가 들어 있는데, 아쉽게도 국내 라이선스로 나올 때는 빠졌다. 일제 CD에는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동시대인들이 그를 어떻게 보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 충분하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그에 대해 카잘스는 "내가 본 가장 위대한 지휘자다"고 말했다 - 카잘스에 대해 "그의 연주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현악기가 어떻게 울릴 수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EMI의 베토벤 첼로 소나타의 해설에서 지그루트 쉼프(Sigrud Schimpf)가 쓴 말은 다음과 같다. "...표현을 위한 이런 큰 요구가 그 자신의 기술적 매체를 창조하고, 지금은 카잘스에게 첼로 연주의 역사에서 파가니니와 리스트가 바이올린과 피아노에서 차지한 자리를 주었다 - 사실, 아마도 더 높을 것이다. 왜냐하면, 카잘스는 사실 첼로가 진지한 독주 악기라는 확실한 인식을 처음 심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Photos

  • EMI 1C 147-01 538/9(2LP) ; Electrola Dacapo series release
  • US Amazon(EMI GR series)
  • 다른 사진들 ; 밑에 소개한 김주은 님의 페이지에서 많은 사진을 볼 수 있다.

Links

(c) 2004~, 이영록 ; 링크는 자유지만, 인용하시려면 우선 제게 메일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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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ed ; 13th Jun. 2004
Last update ; 30th Ap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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